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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빵에 잼 바르기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푸르고 높았다. 길가에 흐드러지게 핀 연분홍빛과 새하얀 코스모스들은 산들바람이 불 때마다 가볍게 몸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그 위로는 투명한 날개를 쉼 없이 파닥이는 고추잠자리 떼가 평화로운 가을의 왈츠를 추고 있었다. 자연은 이토록 풍요롭고 아름다웠지만, 그 길을 걷고 있는 낡은 외투 차림의 노숙자 부부의 발걸음은 천근만근 무거웠다. 며칠째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한 그들의 뱃속에서는 쉴 새 없이 허기의 아우성이 울려 퍼졌다. 저 멀리 산기슭 아래, 저녁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평화로운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남편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아내에게 기대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 저 마을에 들어가면 분명 인심 좋은 누군가가 갓 구운 두툼한 식빵을 줄 거야. 난 말이..
김종환 박사 시니어 칼럼 ② 금혼식, 박수가 멈춘 후에
결혼 50주년 금혼식 날이었다. 월남참전용사였던 남편과 아내를 축하하기 위해 자손들과 친지들이 모였다. 사람들은 반세기 동안 가정을 지켜 온 노부부에게 박수를 보냈고, 두 사람은 다정하게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하객들이 돌아간 뒤, 아내가 자손들 앞에서 뜻밖에 ‘졸혼’을 선언했다. “오늘로 아내 노릇을 졸업하고 싶구나. 남은 생애는 나 자신으로 살고 싶다.” 남편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지만 자녀들은 어머니를 이해했다. 지휘관처럼 명령만하고 애정은 좀처럼 표현하지 않았던 아버지에게 상처받으며 자랐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가족을 위하여 희생적으로 책임을 다했다는 것도 알지만, 어머니가 아버지의 가부장적 언어폭력 속에서 외롭게 살아왔는지도 알고 있었다. 물론 당시 군사문화와 가부장적 문화는 남편의 권위..
김병근 칼럼 / 준비된 인생은 아름답다
꽃이 달콤한 꿀을 머금고 있으면, 굳이 부르지 않아도 아름다운 나비들이 자연스레 그 향기를 좇아 모여든다. 꿀을 준비한 꽃에게 나비가 찾아오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이치다. 이처럼 우리의 일상도 무언가를 내면에 채우고 준비하는 과정의 연속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크리스천인 우리는 과연 내면을 무엇으로 준비하고 채워야 하는가? 과거 호주 타스메니아를 여행할 때의 일이다. 섬의 중앙부를 지나며,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을 것 같은 척박하고 깊은 계곡에 조그마한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의아한 마음에 살펴보니, 그곳에 사람들이 모여든 단 하나의 이유는 바로 '광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배고픈 사람이 먹을 것이 있는 곳으로 자연히 모이듯, 사람들은 자신에게 필요한 생명줄과 자원이 있는 곳이라면 ..
금(金) 이야기
1921년 9월, 경주 노서리에 있던 한 주막의 뒷마당을 넓히려고 땅을 파다가 이곳에서 1만 여점의 유물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와 세상을 놀라게 한 적이 있다. 금관총으로 명명된 이곳에서 금관을 비롯한 금 허리띠와 금장신구들은 그 섬세한 모양과 함께 1,000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전혀 변하지 않는 특유의 노란색이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금속이면서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 찬란한 색을 뽐내는 금속이 금(Gold)이다. Au로 표시되며 원자번호 79, 비중 19.3으로 원소 중 가장 무거운 광물이다. 이 금은 그 희소성과 화려함 그리고 불변의 색으로 인하여 인간에게 크게 관심을 모은 광물로 역사적으로 권력자들의 촤대 관심을 가졌던 귀물이었다. 엄지손가락정도의 금으로는 보통건물(주택)..
김종환 박사 시니어 칼럼 ① 가족의 두 얼굴
‘사랑과 미움, 감사와 원망’이 함께 있는 곳이 가정이다. 가족은 가장 깊이 사랑하는 관계이지만, 또한 서로 깊은 상처를 줄 수도 있다. 이것이 가족의 두 얼굴이다. 1997년 안식년으로 연합교회신학교(UTC)에 왔을 때, 한 잡지의 요청으로 가정칼럼을 연재하게 되었고, 독자들 중에 상담을 요청하는 가정들이 자주 있었다. 상담실이 없으니 신학교 교실에서 혹은 공원 벤치에서 내담자들을 만났다. 당시 동포사회에 카운슬링이 절실함을 알고, 급하게 전화상담교육을 하고, ‘호주생명의 전화(초대 이사장 홍관표 목사님)’가 탄생되었다. 이런 경험들로 시드니 한인가정의 두 얼굴을 자주 보게 된 셈이다. 오늘은 시니어 부모 세대와 중년 자녀 세대에 나타나는 가족의 두 얼굴을 생각해보려고 한다. 시니어 부모들은 언어와 ..
김병근 칼럼 / 몸이 보내는 경고 신호
지난 20년 동안 매주 30km를 달리며 누적 거리 3만 km를 넘어섰다. 이 길고 꾸준한 달리기의 시작은 건강을 위한 단순한 선택이 아니었다. 20년 전 목회 현장에서 무리하다 찾아온 구안와사는 얼굴의 감각을 앗아갔고, 밥을 씹고 말을 하는 당연한 일상조차 힘겨운 고통으로 만들었다. 온갖 치료에도 차도가 없던 그때, 신경에 좋은 운동이라는 지인의 권유로 시작한 달리기는 기적처럼 나를 회복시켰고 지난 세월 동안 약 한 첩 없이 건강을 유지하게 해 준 고마운 동반자였다.그런데 최근 오른쪽 무릎 주위에 통증이 찾아왔다. 뼈나 관절의 큰 이상이 아니라 인대 손상으로 인한 염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돌이켜보면 내 다리의 근육은 늘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었고 때때로 뻐근함을 호소했지만, 나는 그저 달리는 데만 집중..
김병근 칼럼 /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선택
인간의 영혼을 깊이 응시했던 시대를 지나, 우리는 지금 뇌라는 미지의 우주를 정밀하게 해부하는 신경과학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오랜 여정 속에서 가장 매혹적인 두 개의 등대,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현대 뇌과학이 밝혀낸 ‘신경가소성’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듯 보이지만, 깊은 곳에서 하나의 거대한 진실을 향해 맞닿아 있습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삶이 만 5세 이전, 어쩌면 우리가 말조차 배우지 못했던 까마득한 유년 시절의 기억과 상처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의식의 수면 아래 가라앉은 무의식은 기계적인 법칙처럼 우리의 발목을 잡고, 평생토록 반복되는 감정의 폭풍과 방어 기제를 만들어냅니다. 사랑받고 싶었으나 거절당했던 기억, 두려움 속에 움츠러들었던..
김병근 칼럼 / 알약의 여정이 들려주는 생명의 신비
나는 최근에 달리면서 다리에 통증을 느끼며, 조그마한 통증및 염증 치료알약 하나 먹고 통증이 가라 앉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궁금한 생각이 하나 떠 올랐습니다. 우리가 무심코 삼키는 작은 알약 하나가 몸속 깊은 곳의 통증을 찾아내 가라앉히는 과정은, 단순히 의학적 효능을 넘어 생명에 깃든 경이로운 섭리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작은 물질이 광활한 우주와도 같은 인체 내부를 항해하여 정확한 목적지에 도달하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이 생물학적 경이로움 속에는 우리의 영혼을 향한 놀라운 영적 진리가 숨겨져 있습니다. 생물학적으로 볼 때, 치유의 시작은 약이 아니라 '상처의 신호'에서 비롯됩니다. 우리 몸에 염증이나 상처가 생기면, 세포들은 침묵하지 않고 살기 위해 격렬한 화학적 구조 신호(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