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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언덕 너머에는?
가을볕이 채 영글기도 전인 새벽, 사위가 푸르스름하게 잠들어 있는 안갯속에서 어머니의 부스럭거리는 손길이 시작되었다. 방 한구석, 눅눅한 아랫목의 냉기를 밀어내며 어머니는 하얗고 둥근 누에고치들을 조심스럽게 무명 보자기 속으로 쓸어 담고 계셨다. 사흘 밤낮으로 불을 지피며 정성껏 키워낸 고치들이었다. 그 하얗고 보드라운 고치들 위에는 우리 가족의 가을 밥숟가락이, 그리고 헐벗은 누이야들의 옷가지가 고스란히 얹혀 있었다. "어머니, 저도 장에 갈래요." 이불속에서 몸을 벌떡 일으키며 내가 조르듯 말했다. 초등학교 3학년의 가을이었다. 학교 가는 신작로 끝을 지나면 늘 저 너머에는 어떤 세상이 펼쳐져 있을까 가슴이 뛰곤 했다. 어머니는 봇짐을 매만지다 말고 기가 차다는 듯 나를 돌아보았다. "거긴 30리 길..
배용찬 장로 창조에세이 / 모세열전 - 광야 80년
야곱가족 70여명이 애굽에 정착한 지 430여년이 지났다. 이스라엘백성이 강성해 지는 것을 본 애굽왕은 이들을 두려워하여 인구를 억제하는 정책을 폈다. 이 때 레위집안에 한 아기가 태어났다. 3개월을 키웠으나 더 이상 키울 수 없어 역청칠을 한 갈대상자에 넣어 강에 띄웠는데 마침 바로의 공주가 이를 발견하여 자신의 아들로 키워진 사람이 모세다. 당시 최고의 권부였던 바로왕궁은 세계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다. 역사학과 수리학 그리고 천문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학문을 두루 섭렵한 모세는 훤훤장부가 되었다. 그가 40세가 되던 해 같은 민족이 학대받는 모습을 본 모세는 애굽의 감독을 죽였는데 이 사실이 탄로가 나서 바로에게 쫒기는 신세가 되었다. 도망자가 된 모세는 라암셋에서 시나이 반도를 가로질러 사막지역 약 4..
없는 빵에 잼 바르기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푸르고 높았다. 길가에 흐드러지게 핀 연분홍빛과 새하얀 코스모스들은 산들바람이 불 때마다 가볍게 몸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그 위로는 투명한 날개를 쉼 없이 파닥이는 고추잠자리 떼가 평화로운 가을의 왈츠를 추고 있었다. 자연은 이토록 풍요롭고 아름다웠지만, 그 길을 걷고 있는 낡은 외투 차림의 노숙자 부부의 발걸음은 천근만근 무거웠다. 며칠째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한 그들의 뱃속에서는 쉴 새 없이 허기의 아우성이 울려 퍼졌다. 저 멀리 산기슭 아래, 저녁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평화로운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남편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아내에게 기대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 저 마을에 들어가면 분명 인심 좋은 누군가가 갓 구운 두툼한 식빵을 줄 거야. 난 말이..
김종환 박사 시니어 칼럼 ② 금혼식, 박수가 멈춘 후에
결혼 50주년 금혼식 날이었다. 월남참전용사였던 남편과 아내를 축하하기 위해 자손들과 친지들이 모였다. 사람들은 반세기 동안 가정을 지켜 온 노부부에게 박수를 보냈고, 두 사람은 다정하게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하객들이 돌아간 뒤, 아내가 자손들 앞에서 뜻밖에 ‘졸혼’을 선언했다. “오늘로 아내 노릇을 졸업하고 싶구나. 남은 생애는 나 자신으로 살고 싶다.” 남편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지만 자녀들은 어머니를 이해했다. 지휘관처럼 명령만하고 애정은 좀처럼 표현하지 않았던 아버지에게 상처받으며 자랐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가족을 위하여 희생적으로 책임을 다했다는 것도 알지만, 어머니가 아버지의 가부장적 언어폭력 속에서 외롭게 살아왔는지도 알고 있었다. 물론 당시 군사문화와 가부장적 문화는 남편의 권위..
김병근 칼럼 / 준비된 인생은 아름답다
꽃이 달콤한 꿀을 머금고 있으면, 굳이 부르지 않아도 아름다운 나비들이 자연스레 그 향기를 좇아 모여든다. 꿀을 준비한 꽃에게 나비가 찾아오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이치다. 이처럼 우리의 일상도 무언가를 내면에 채우고 준비하는 과정의 연속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크리스천인 우리는 과연 내면을 무엇으로 준비하고 채워야 하는가? 과거 호주 타스메니아를 여행할 때의 일이다. 섬의 중앙부를 지나며,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을 것 같은 척박하고 깊은 계곡에 조그마한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의아한 마음에 살펴보니, 그곳에 사람들이 모여든 단 하나의 이유는 바로 '광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배고픈 사람이 먹을 것이 있는 곳으로 자연히 모이듯, 사람들은 자신에게 필요한 생명줄과 자원이 있는 곳이라면 ..
금(金) 이야기
1921년 9월, 경주 노서리에 있던 한 주막의 뒷마당을 넓히려고 땅을 파다가 이곳에서 1만 여점의 유물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와 세상을 놀라게 한 적이 있다. 금관총으로 명명된 이곳에서 금관을 비롯한 금 허리띠와 금장신구들은 그 섬세한 모양과 함께 1,000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전혀 변하지 않는 특유의 노란색이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금속이면서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 찬란한 색을 뽐내는 금속이 금(Gold)이다. Au로 표시되며 원자번호 79, 비중 19.3으로 원소 중 가장 무거운 광물이다. 이 금은 그 희소성과 화려함 그리고 불변의 색으로 인하여 인간에게 크게 관심을 모은 광물로 역사적으로 권력자들의 촤대 관심을 가졌던 귀물이었다. 엄지손가락정도의 금으로는 보통건물(주택)..
김종환 박사 시니어 칼럼 ① 가족의 두 얼굴
‘사랑과 미움, 감사와 원망’이 함께 있는 곳이 가정이다. 가족은 가장 깊이 사랑하는 관계이지만, 또한 서로 깊은 상처를 줄 수도 있다. 이것이 가족의 두 얼굴이다. 1997년 안식년으로 연합교회신학교(UTC)에 왔을 때, 한 잡지의 요청으로 가정칼럼을 연재하게 되었고, 독자들 중에 상담을 요청하는 가정들이 자주 있었다. 상담실이 없으니 신학교 교실에서 혹은 공원 벤치에서 내담자들을 만났다. 당시 동포사회에 카운슬링이 절실함을 알고, 급하게 전화상담교육을 하고, ‘호주생명의 전화(초대 이사장 홍관표 목사님)’가 탄생되었다. 이런 경험들로 시드니 한인가정의 두 얼굴을 자주 보게 된 셈이다. 오늘은 시니어 부모 세대와 중년 자녀 세대에 나타나는 가족의 두 얼굴을 생각해보려고 한다. 시니어 부모들은 언어와 ..
김병근 칼럼 / 몸이 보내는 경고 신호
지난 20년 동안 매주 30km를 달리며 누적 거리 3만 km를 넘어섰다. 이 길고 꾸준한 달리기의 시작은 건강을 위한 단순한 선택이 아니었다. 20년 전 목회 현장에서 무리하다 찾아온 구안와사는 얼굴의 감각을 앗아갔고, 밥을 씹고 말을 하는 당연한 일상조차 힘겨운 고통으로 만들었다. 온갖 치료에도 차도가 없던 그때, 신경에 좋은 운동이라는 지인의 권유로 시작한 달리기는 기적처럼 나를 회복시켰고 지난 세월 동안 약 한 첩 없이 건강을 유지하게 해 준 고마운 동반자였다.그런데 최근 오른쪽 무릎 주위에 통증이 찾아왔다. 뼈나 관절의 큰 이상이 아니라 인대 손상으로 인한 염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돌이켜보면 내 다리의 근육은 늘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었고 때때로 뻐근함을 호소했지만, 나는 그저 달리는 데만 집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