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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빵에 잼 바르기

OCJ 2026. 9. 15. 17:14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푸르고 높았다. 길가에 흐드러지게 핀 연분홍빛과 새하얀 코스모스들은 산들바람이 불 때마다 가볍게 몸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그 위로는 투명한 날개를 쉼 없이 파닥이는 고추잠자리 떼가 평화로운 가을의 왈츠를 추고 있었다. 자연은 이토록 풍요롭고 아름다웠지만, 그 길을 걷고 있는 낡은 외투 차림의 노숙자 부부의 발걸음은 천근만근 무거웠다. 며칠째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한 그들의 뱃속에서는 쉴 새 없이 허기의 아우성이 울려 퍼졌다.

저 멀리 산기슭 아래, 저녁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평화로운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남편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아내에게 기대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 저 마을에 들어가면 분명 인심 좋은 누군가가 갓 구운 두툼한 식빵을 줄 거야. 난 말이야, 그 부드러운 빵 위에 고소하고 짭짤한 땅콩잼을 아주 듬뿍, 흘러내릴 정도로 발라서 먹을 테야."

그러자 묵묵히 걷고 있던 아내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무슨 소리예요? 땅콩잼은 영양가도 많고 든든하니까 기력이 달리는 내가 먹을 거예요. 당신은 저기 달콤한 딸기잼이나 발라 먹어요."
남편은 어이가 없다는 듯 걸음을 멈춰 서서 언성을 높였다.

"아니, 내가 먼저 땅콩잼을 먹겠다고 생각했잖아! 당신이 딸기잼을 먹어!"
"참 나, 그깟 땅콩잼 하나 양보 못 해요? 부드러운 땅콩잼은 무조건 내 거라니까요!"
코스모스가 만발한 아름다운 길 위에서, 부부의 유치한 말다툼은 점차 감정싸움으로 번졌다. 서로 내가 땅콩잼을 먹겠노라 나름의 논리를 세우며 핏대를 세웠다. 빵 굽는 냄새조차 맡지 못했지만, 두 사람의 마음속에는 이미 커다란 땅콩잼 한 통이 굳건히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렇게 씩씩거리며 마침내 마을 어귀에 들어선 부부. 하지만 마을의 현실은 그들의 상상처럼 따뜻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바쁜 걸음으로 각자의 집을 향했고, 낯선 이방인 부부의 남루한 행색을 보자 서둘러 대문을 굳게 걸어 잠갔다. 고소한 빵은커녕 찬물 한 그릇 내어주는 이조차 없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차가운 가을바람이 마을 골목을 맴돌았다. 부부는 마을 밖 낡은 돌담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여전히 텅 빈 손, 그리고 미친 듯이 요동치는 뱃속의 허기. 남편이 허공을 응시하다 불쑥 입을 열었다.
"여보... 우리, 땅콩잼은 고사하고 빵 부스러기 하나 구경 못 했네."

그제야 아내도 남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존재하지도 않는 빵과 땅콩잼을 두고 얼굴을 붉히며 싸웠던 불과 한 시간 전의 자신들이 떠올랐다. 실체 없는 허상에 집착해 서로의 마음에 생채기를 냈던 헛헛한 감정들이 신기루처럼 흩어졌다. 두 사람은 동시에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의 웃음소리가 스산한 가을바람을 타고 저무는 들판 너머로 번져갔다.

 


하지만 그 허탈한 웃음 끝에 찾아온 것은 체념이나 절망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이 가진 가장 질기고 위대한 힘, 바로 내일에 대한 작은 소망이었다. 비록 오늘 하루는 헛된 실랑이 속에서 빈손으로 끝났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어깨를 툭툭 털어주며 다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직 세상 어딘가에는 갓 구운 빵의 온기가 남아있을 거라는,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 것이라는 희망을 다시금 가슴에 불어넣으며. 붉게 기울어가는 저녁노을을 등진 채, 두 부부는 또 다른 마을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묵묵히 새로운 발걸음을 떼놓기 시작했다.

글쓴이: 김병근 (엠마오 상담대학 학장, Ph.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