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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이름 “코리언 오스트레일리안”에 관하여(Who is the “Korean Australian”?)

OCJ|2026. 4. 7. 01:16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로마서 8: 24) 

 

이 사도 바울의 고백은 결국 우리 모든 인간의 고백이다. 이 고백으로부터 자유로울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어떤 형식으로 현재를 살아가고 있든지 간에 모든 인간은 여러 괴로움과 고통이 있고 어차피 인간의 그 육신은 죽음이라는 실존을 짊어진 곤고한 존재들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죽음을 향한 존재”로 규정하고 인간 개개인의 죽음의 순간을 아무와도 함께 할 수 없는 절대 허무와 절대 고독의 순간으로 묘사하였다. 모든 인간은 결국 그것과 대면 하여야 한다. 바르트(K. Barth)는 인간으로서 가장 절망적인 인간 최후의 바로 그 순간에 비로소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된다고 천명하였다.

 

창세기에 보면 아담이 하와와 더불어 최고의 금기인 선악과를 따먹었다. 인류의 가장 큰 불행, 그 대형 사고를 치고 나서 아담의 마음이 편안했을까? 아담의 인생은 이제 꼬일데로 꼬여서 이제 아무 해결책도 없고 너무 괴로워 어디에도 편안히 있지 못하게 된다. 절대 절명의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운 상황, 눈앞에 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파멸과 죽음의 그림자가 그 앞으로 성큼 다가온 상황이었다. 아무런 해결책 없이 결국 숨게 되었을 바로 그 장면에서,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르신다. 아담의 이름을 부르시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르신 것은 심판의 역사가 아니라 구원의 역사다. 아담이 죄를 짓자마자 그 자신이 바로 심판의 시간으로 뛰어들어가 버린 것이고, 하나님께서 아담의 이름을 부르시는 순간부터 아담에게는 해결의 실마리,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유일한 해결책, 그리고 새로운 삶의 시작은 바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의 그 부르심, 그 한마디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다.  오직 그 순간 부터, 오직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는 그 순간만이 완전히 망쳐버린 아담의 인생에 또 다른 새로운 출발이 가능한 것이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의 사람들에게 이름을 부르셨음을 볼 수 있다. 사명자들의 이름을 부르시는 것을 보게 되고 때에 따라서는 믿음의 조상들의 이름을 바꾸어 주시기도 한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셨고 사울은 바울이 되었다. 요한복음 21장 15절부터 보면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실 때 주님께서 베드로의 이름을 세번을 부르신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요한의 아들 시몬아, 요한의 아들 시몬아. 주님이 이름을 불러 주셔야 참된 주님의 사람으로서 사명을 갖게 되고 그 순간 부터 주님의 사역이 시작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개인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라는 국가 공동체를 부르시기도 하였다. 유대 민족은 과거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였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자체는 선민이라는 탁월한 정체성을 상징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이름 이스라엘, “이스라엘아! 내 백성 이스라엘아!” 하나의 보잘것 없는 떠돌이 민족 공동체가 오직 하나님의 이 부르심으로 인하여 이 세상 민족 중에 가장 위대한 의미를 지닌 민족의 이름이 되었으며 어찌보면 이세상에서 가장 가치있는 공동체의 이름으로 새로이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인간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방식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사회학적으로 인간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많은 부분이 자신이 살고 있는 지리적 여건에 달려 있다고 한다. 쉽게 말하면 어디에 살고 있느냐가 우리의 정체성을 상당부분 결정해 주는 것이다. 이 말은 결국 우리는 더 이상 고국에 사는 이들과 같은 정체성을 부여 받을 수 없다는 예기가 된다. 그렇다고 또한 우리가 이곳에 가장 많은 백인들과 무조건적인 같은 정체성을 모방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호주 땅에 있는 우리에게는 공통적으로 우리들 만의 정체성이 있고 우리들만의 이름이 있어야 한다. 어디에서도 있어 본적 없고 어느 누구에게서도 없었던 오직 이곳 호주, 새 땅에서 새로 부여 받은 새로운 개인의 이름, 새로운 공동체의 이름이 있다. 그것은  Korean Australian이라는 이름이다. 

 

 

그것은 애당초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부여 받은 새로운 정체성의 이름인지 모른다. “Korean Australian”? 이중 문화인? 이중 국적자인가? 한국계 호주인이라는 말인가? 아니면 100% 한국인 100% 호주인을 지칭하는 말인가? 아무튼 그 이름은 한국인 이민자로서 우리 고유의 이름이다. 우리는 그 이름에 여러 가지 실존적이고도 신학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그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 바로 우리 자신에 대한 깨달음이요 또한 호주 이민 생활의 진정한 시작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Korean Australian은 한국에서 호주로 온 역사를 반영하는 우리 모두를 위한 이름이다.  Korean Australian 은 두가지 문화가 이름안에 내재되어 있는 독특한 이름이다.  필자가 말하는 Korean Australian 은 시민권자, 영주권자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비자 종류와 여부에 상관없이, 호주 체류 기간에 상관없이 이 땅에 서 있는 한국 피가 섞인 모든 사람들을 지칭한다.

 

Korean Australian은 새 이름이다. 새 이름은 새로운 존재를 지칭한다. 어찌 보면 우리는 이민을 통하여 다시 한번 태어난 사람들이다. 새 사람인 것이다. 그 증거중 하나가 바로  Korean Australian이라는 새 이름 안에 이미 들어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전에 없던 이름이기 때문이다. 이 이름에서 필자가 강조하는 것은 한국계 호주인이라는 뉘앙스가 아니다. 단지 새로운 땅에서 새로 부여 받은 새 이름이요 새 인간 이라는 점이다. 진정으로 자신을 되돌아 보고 그 이름의 의미를 자기의 것으로 하는 자에게 그 새로운 이름이 깊은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믿음으로 저가 왜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히 11:8-10). 아브라함과 같이, 나의 친척 본토 아비집 한국을 떠나,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으로 보내셨다고 하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온전한 확신, 하나님의 인도와 나의 이민과의 상관관계에 대한 진정한 믿음이 있는 자들에게 Korean Australian 이라는 이름 또한 진정한 실존적, 신학적 정체성을 가져다 줄 수 있다.

 

이민으로 인하여 사회학적으로 다른 정체성을 부여받고 새로운 이름으로 탄생하게 되는 것은 오직 그 의미를 깊이 있게 파악하고 철저히 깨닫는 자들의 몫이다.  새로운 정체성을 가슴으로 깨달은 자는 새로운 존재가 된다. 하나님의 인도와 섭리를 깨달은 호주 이민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다. 새로운 존재인 것이다.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이 누구든지 예수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 보라 옛것은 지나가고 새것이 되었다.

 

우리에게 삶으로 신앙으로 새로 태어날 기회를 주는 새 땅 호주에서 나의 고유한 이름을 부르시고 나의 고유한 사명을 주시는 나의 하나님을 만남으로 우리는 새로 창조되는 나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에베소서 4:24). “Korean Australian”이라는 이름이 주는 우리만의 그 특별한 정체성은 무엇일까? 그 우리만의 정체성으로 이곳 이민 지에서 우리가 살아야 할 그 실존적 삶은 도대체 무엇일까? 또한 우리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의 방식, 신앙의 방식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분명한 것은 같은 이민자들이라 할지 라도 우리는 백인 호주인은 아니다. 그들처럼 먹고 그들과 똑 같은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도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아니 생긴 것, 생각하는 방식, 아니 존재 자체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여러 가지 배워야 할 것들이 많은 것은 당연하지만, 무턱대고 그들의 문화와 삶의 방식을 따라 할 수는 없다. 우리 아이들을 100% 백인식으로만 키우는 것 또한 훗날 우리 후세들에게 진정한 만족을 가져다 주지 못할 것은 자명한 노릇이다.  

 

우리는 호주에 살면서 어떠한 일을 하며 살든지 우리의 이 정체성과 관련하여 바로 생각해야 하며 2세들에게, 후세들에게도 잘 답변해야 할 책임을 지니고 있다. 또한 좋고 명예로운 호주 시민으로 살기 위하여도 그리고 다문화 사회인 호주에서 다른 문화권과 조화롭게 살기 위해서도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을 깨닫고 점검하는 것이 중요하다. 

 

언제고 우리 아이들이 이렇게 질문 할지도 모를 일이다. 아빠 나는 누구입니까?  백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한국에 있는 한국인 같지도 않고 나는 누구로 살아야 합니까?  나는 왜 한국 사람과도 다르고 호주의 이 많은 사람들과도 다릅니까? 나는 누구입니까?

 

너는 코리언 오스트레일리안이다. 그말은 훌륭한 코리언으로 또한 동시에 훌륭한 오스트레일리안으로 잘 성장해야 한다는 말이다.  네 안에 둘이 다 들어 있기 때문이다. 마치 예수님이 인간이시고 동시에 하나님이셨던 것처럼 우리는 100퍼센트 코리안 100 퍼센트 오스트레일리안으로 살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너는 다른 호주인들과는 달리 한국말도 열심히 배우고 영어도 배워야 하는 것이다. 두가지 문화를 완벽하게 잘 배워야 하는 것이다. 너는 코리언 오스트레일리안이기 때문이다.

 

필자의 이 대답이 반드시 이곳의 모든 한인들에게 적용이 되며 또 교과서적인 정답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모두의 이 정체성에 관한 이러한 부분들은 필자나 어느 한 두 명의 한국인들이 정의 내릴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또 쉽게 거론하기 보다는 많은 경험과 연구가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어찌보면 그것이 우리가 이 새로운 땅에 살아야 할 이유인 것이다. 죽는 그 순간까지 우리는 이 땅에 살게 된 이유를 그리고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해서 또한 영원을 향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순례자의 삶을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Korean Australian”속에 내재된 실존적 삶의 모습이지 않을까?

 

이민으로 형성된 국가에서, 역사성으로 따질때 한 5천년 묵었으면 모를까 일 이백년 먼저 이땅에 들어 왔다고 그렇게 차별을 일삼는 것은(정작 몇 만년 먼저 들어온 사람들은 착한데) 정말 지나가는 소가 웃을 일이다. 좀 더 덩치가 크다고, 좀 더 하얗게 생겼다고 다른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짐승의 두뇌를 가진 존재들이나 하는 짓거리다. 

 

우리는 이 땅에 합법적으로 사는 한 호주인의 한 사람이며 Korean Australian 은 이땅에서 누구에게도 굴하지 않을 당당한 정체성이다. (특히 자녀들에게 잘 설명해야 할 의무가 있다.)

 

필자는 이제부터 호주 한인 이민자 우리들의 이름인 Korean Australian의 삶과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 한다. 호주 이민은 내가 원해서 내 의도로 인생길을 걷는 것 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보다 성숙한 안목으로, 영성의 눈으로 보면 다 인명은 재천이요, 하늘의 뜻이요 다른 표현으로는 하나님의 섭리요, 하나님의 경륜이라 해야 어울리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내가 나 된것 내가 호주 온 것은 내가 Korean Australian이 된 것은 내 의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그걸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떠나 보내셨다고 표현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떠나 보냈다. 마찬가지로 나도 하나님께서 떠나 보내신 것이다. 왜 잘 살고 있는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을 고향땅에서 떠나게 하셨을까?

 

떠나 보내신 깊은 뜻 중에 첫번째가 뭘까 먼저 필자의 해답은 이러하다. 다른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다. 다시 태어나게 하기 위해서다. 그러면 왜 다시 태어나야 하는가. 그래야 정말 행복하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한번은 다시 태어나야 자신을 찾고 정말 인간답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적 표현으로는 중생이다. 사람이 바뀌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인간은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바뀌지 않는다. 그 사람을 완전히 바꾸기 위해서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이고 다시 태어나는 것의 기본이 옮겨 감이다. 떠남이요 전문용어로 이민이다. (주재원, 유학생, 장기 방문자도 이민자의 범주에 포함된다.) 그 이유는 이민을 떠나면 정체성이 바뀌기 때문이다.

 

다른 인간을 만드는데 기본이 되는 첫번째 할 일이 바로 정체성을 바꾸는 일이기 때문이다. 요즘 핫한 성 정체성 문제를 포함하여 정체성에도 여러가지 요소가 있지만 아무튼 그 놈의 정체성을 완전히 바꿔야 완전히 새로운 인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체성을 바꾸는 일은 쉽지않고 완전히 새로운 인간이 되기도 쉽지않다. 그래서 일단 떠나고 봐야 하는 것이다. 일단 기본적으로 주어진 것들, 친숙한 것들을 버리고 조상 아비집을 떠나, 그 살던 사회구조에서 먼저 떠나기 부터 해야한다.

 

그래서 떠나온 호주, 그래서 부여받은 우리들의 이름, 우리들의 정체성이 바로 Korean Australian이다. 오늘도 나는 광야와 같은 호주에서 모세처럼 신발을 벗고 하나님 앞에 서있다. 그리고 질문한다. 하나님, 나는 누구입니까?  하나님  Korean Australian, 우리는 누구입니까? 하나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큰빛 장로교회 이지훈 목사 (rheelight@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