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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이민자 우리들의 이야기 4 - 이민과 주변인 (Marginal person)

OCJ|2026. 4. 26. 05:43

 

어느 문학가는 우리 인간은 스스로 알 수 없는 어떤 고향에 대한 향수 같은 것을 늘 지니고 산다고 말한다. 

(We always have a nostalgia for a home we don’t know.) 모든 인간은 죽음을 짊어진 반면  결국 자신이 소멸 되어 없어져 버리지 않는 그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또한 함께 가지고 있다고 성경은 묘사한다.   

 

인간 마음 속에 있는 막연한 고향에 대한 동경, 인간 최후에 도달 할지 모르는 어머니 품 같은 집에 대한 그리움, 노스텔지어 같은 심정, 이런 말들은 어찌 보면 고향을 떠난 ‘이민자(Migrant)’들의 마음을 생생하게 설명해 주고 있지 않는가?  그런 마음이 인간을 신앙으로의 순례자로 만든다. 그런 마음이 인간으로 하여금 이민자의 정체성을 갖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결국 이민을 갔든 아니든 어찌 보면 모든 인간은 다 자신이 진정으로 정착할 곳을 찾아야 하는 이민자들인 것이다.  이민에 대한 신앙적 설명은 바로 거기에서부터 가능하다.

 

어쩌면 우리는 이러한 이민자의 심정이 극대화 되어 정착할 새로운 터전을 찾아 또는 더 잘 살곳을 찾아 이 머나먼 호주땅까지 왔는지도 모른다. 아니 우리의 그 심정을 바로 하나님께서 이용하셨을까?  아니면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 바로 그 이민자의 마음일까? 

 

우리 나라 옛말에 “아들이 귀엽거든 집 떠나서 멀리 내보내라”는 말이 있다. 선진들은 왜 그렇게 집을 떠나서 멀리 보내라고 하였을까? 그 이유는 기본적으로 밖에 나가서 고생을 해 봐야 하기 때문이다. 고생을 해야 사람이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선진들과 같은 그 부모의 심정으로 우리를 호주땅에 보내신 거라면 혹은 나의 이민이 아브라함과 같은 신앙적인 소명으로 받아들여진 사람의 경우라면 그 땅에서 마주하게 될 고난에 대하여도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것은 자명한 일이다.

 

어느 목사님 말씀처럼 “우리에게 오는 모든 고생과 어려움이라는 것은 왜 있나. 나는 왜 이렇게 고난의 삶을 사는가. 내 영혼이 은총을 입어 깨게 하기 위해서”다. 우리에게는 호주 땅에 예비된 특별한 고난이 있다. 그것은  ‘주변성(Marginality)’이라 불리우는 낯선 곳에 처음 온 이민자들이 종종 갖게 되는 감정 혹은 정체성 중 하나이다. 새로운 고난을 상징하지만 어찌 보면 이것은 이 호주땅에 하나님께서 은총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 놓으신 첫번째 관문이 될 수도 있다. 

 

주변성이란 좀 어렵게 말하면 그 사회를 주도해 나가는 세력의 반대 세력의 특성을 지칭한다. 그 주변성을 가진 주변인(Marginal person)이라는 것은 소속되어 있는 사회를 이끌어 가는 지배 계급이거나 말 그 사회의 기득권 세력에 들지 못하고 말그대로 주변을 맴도는 자들을 일컫는다. 어찌보면 그 사회의 약자들, 소외계층을 대변하며 이 주변성 자체는 때때로 큰 고통을 의미하기도 한다.

 

새롭게 이민온 사람들 다수는 종종 나도 모르게 어느새 이런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물론 이민자라고 해도 다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체로 고국땅을 떠나 처음 낮선 땅에 와서 언어와 문화의 어려움과 그로 인한 여러가지 한계에 직면하는 우리들 다수의 자연 스러운 감정이요 정체성인지도 모른다.

 

주목할 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주님 공동체의 정체성과 이 세상에서의 모습은 항상 이와 같은 모습이었다는 점이다.  그 사회의 주도세력이 아니고 억압받고 차별받고 연약한 세력이었다. 부자들과 소위 성공한 사람들 보다는 오히려 철저히 그 사회에서 버림받은 자들, 내 눈에 보이는 이세상에서는 도무지 참된 소망을 발견하기 어려운 사람들의 메시야로서 우리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셨다. 

 

유대종교로 부터 버림받은자들인 나병환자, 더러운 질병을 가진 자들 , 창녀들, 단순히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것 뿐만이 아니라 그 사회에 철저한 죄인으로 치부 받은 자들로서 주목할 것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 공동체로부터 버림받은 자들이었다는 점이다. 질병으로 받는 고통 보다 더 큰 그들의 진정한 고통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절망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주님은 세상 사람들이 근처도 가기 싫어하는 그들의 친구로 오시고 늘 그들 주변에 계셨다. 그리스도안에서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을 온몸으로, 삶으로 보여 주심으로서 진실로 낮은 자들과 함께하는 하나님의 모습, 임마누엘을 증거 하셨다. 그들의 병을 고쳐주셨을때 그들이 진정 기뻐했던 것도 병 나은 그런 정도의 레벨의 일시적인 기쁨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와 함께, 우리를 버리지 않고, 우리를 위해 오신것을 체험한 것이다. 그것은 영원에 참여하는 기쁨이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임마누엘의 기쁨인 것이다. 정말 그리스도안에서 놀랍고 새로운 정체성을 찾게 된 것이었다. “보라 옛것이 지나고 새것이 되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고 후 5:17).

 

세상에서 버림받았지만 세상에서는 실패했지만, 그들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서 성공한 자들,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한 자들이 되었다. 그들이 그 사회에서 겪은 연약함(Marginality), 고난은 임마누엘의 도구였으며 세상이 규정했던 그 저주가 아니라 오히려 주님을 만나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와 은총이었던 것이다.

 

모세가 떨기 나무 앞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에 그는 고향 땅에 있지 않았다. 이민의 땅, 인적없는 산속 깊은 곳에서 모든 제도권에서 완전히 밀려난 말 그대로 버림 받은자(Marginal person)의 모습 이었다. 바로 그 상태에서 하나님이 그를 찾아 오셨다. 약할때 강함되시는 하나님께서 찾아오셨다.

 

진정 인간의 가장 연약한 그 순간에, 다시 말하면 나의 정체성이 낮아지고 철저히 무너질 때 하나님과의 만남이,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 진다고 성경은 증언 한다. 어찌 보면 내가 나를 가장 모를 때 하나님께서 나에게 진정한 정체성을 부여하시는 거다. 가장 연약한 그 순간에 나는 누구인가라는 모세의 질문에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고 대답하신다. (출 3:11-12) 이 순간이 인간에게 가장  큰 깨달음의 순간이요, 가장 연약한 인간이 가장 위대한 인간이 되는 순간이다. 모세는 그 순간 부터 그 임마누엘에서 자기 존재에 대한 해답을 발견하고 새로운 정체성(Identity)을 부여 받게 된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인간” 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이 “임마누엘의 존재” 이것보다 더 위대한 인간은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순례자인 우리가 주변인인 우리 이민자들이 깨달아야 할 위대한 정체성인 것이다.  (영성의 눈으로 보면 순례자와 주변인은 다 같은 말일 수 있다.)

 

모세는 가장 큰 고난의 싯점에서 가장 의미있는 소망을 발견한다. 자기는 이렇게 끝나는 한심한 인생이 아니라 이 고통의 이면에서 발견한 영원한 존재, 하나님과 함께라는 이 위대한 존재라는 그 정체성을 갖게 된 것이다. 인간으로서 깨달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깨달음의 순간이요 이 순간이야 말로 나의 한 평생 중에 가장 의미있고 값진 은총의 순간이 아닌가? 하나님과 함께라는 이 임마누엘의 정체성, 어찌 보면 이것은 이렇게 말로 해서 쉽게 언어로 깨닫는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의 선언과 같이 다시 태어남과 같은 뼈아픈 고난을 통과 함으로써, 그리스도로 인하여 자신의 생명으로서 온 영혼으로서 체득하는 것이다.

 

그 위대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배후에 바로 인간의 연약함, 그 주변성(Marginality)이 자리 한다.  세상에 안주해 있는 교만한 인간 앞에 임마누엘은 없다. 뿌리뽑힌 자들, 자신을 이미 부인하고 십자가를 진 상태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철저히 임마누엘의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민자로 만드셨고 철저히 우리를 주변인으로 살게 하시는 것은 아닐까?

 

하나님의 역사, 참된 복음은 늘 인간의 연약함에서 출발을 한다. 나의 연약함이 하나님의 강함 이시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호주 땅에서 특별히 맞이한 이 주변성(Marginality)은 우리에게 얼마나 고마운 것인가.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그 임마누엘을 가능케 하는 도구요 순례의 길에서 나를 연단하는 참된 학습이기 때문이다.

 

영성이란 때때로 인간의 이성을 뛰어넘는 것이다. 우리들의 시간들 중에서 밤이 밝을까? 낮이 밝을까? 이성의 눈으로 보면 낮이 밝다. 그러나 영성의 눈으로 보면 밤이 더 밝을 수 있다. 낮에 안보이는 저 먼 밤 하늘의 별들과 은하수, 우주의 먼곳까지 밤에는 볼 수 있다. 오히려 어두운 밤에 낮에 보지 못한 진정한 먼 소망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내 인생이 연약한 순간, 내 삶이 고통의 어두운 터널을 지날때 영성이 깨치고 비로소 참된 소망을 바라다 볼 수 있는 것이다.

 

눈물젖은 빵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이 주변인(Marginal person)으로서 느끼는 이 진지하고 참된 그 이민생활의 진한 맛을 알 수 있을까? 고난이 없는 신앙은 참 신앙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고난, 이 특별한 호주 이민자가 갖는 주변성은 그러기에 참된 축복의 도구이다.  가장 나약한 존재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로 가는 놀라운 신비의 도구요.  주님 공동체의 진정한 정체성을 회복하는 기적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고국에 없는 남십자성이 떠있는 나의 이민의 땅,  호주의 밤 하늘을 바라다 본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시 63).

 

 

큰빛 장로교회 이지훈 목사 (rheelight@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