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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보기 →호주 이민자 – 우리들의 삶과 정체성의 이야기

이름에 대하여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수님의 ‘꽃’이다.
부모님 혹은 선조들께서 지어주신 자신만의 소중한 이름을 호주 땅에 와서야 되찾고 그 의미를 깊이 있게 되새겨 보는 이들이 있다. 항상 어머니 삼촌 언니등 관계의 이름이거나 사장님 변호사님 선생님등 직위의 이름으로만 불려 지다가 호주에 와서야 비로소 자신의 원래 이름을 찾는 느낌을 갖게 되기도 한다.
자연스레 그렇게 되는 이유는 마주치는 이 땅의 사람들이 자꾸 이름을 물어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항상 내가 가르쳐준 나의 이름을 부른다. 이 땅의 사람들은 아무도 한국에서와 같이 직위나 성+직위로 사람을 부르지 않는다. 이부장님 강사장님 이집사님 박권사님 등. 그러기에 나의 이름을 가르쳐 주어야 하는 것이 자연스런 이곳 문화요 호주 이민에의 시작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이름을 다시 생각해 보고 우리 자신의 이름에 대한 결정을 다시 해보는 순간이 있게 마련이다. 한국에서의 나의 이름을 계속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이 땅에서 부르기 쉬운 이름으로 새로 만들 것인가? 그 점에 관한 옳고 그름이나 정답은 없다고 보여진다. 다만 모두의 개인적인 선택에 달려있을 뿐이다. 아무튼 호주 이민의 출발 선상에 우리들 이름의 문제가 하나 놓여 있다.
오래 전 기억을 되살려 보면 필자는 아버님이 지어주신 한국이름을 고집해서 호주 도착 시부터 사용하기 시작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존경할 만한 어느 분들이 하시는 것처럼 원래 이름에 대한 가족적, 민족적, 국가적 사명감이나 혹은 특정한 신념 때문에 그랬던 것이라기 보다는 단지 약간의 자존심과 나 자신의 스타일을 고려해서 그렇게 결정하였던 것 같다.
영어 발음도 나이스해 보이지 않는데다 생긴 것도 한국 토종으로서 도시 보다는 시골 스타일로 보여지는 내 얼굴이나 모습에 조지니 마이클이니 서양이름이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여튼 나의 그 한 순간 판단으로 인하여 피해자들이 있었는데 긴 세월 특히 신학 및 목회 기간 동안 나의 이름으로 인하여 고집하는 그 어려운 이름으로 인해 적지 않은 애로를 겪던 호주인들이 여럿 생각 나기도 한다.
호주 이민의 출발 선상에서 우리가 이름을 되돌아 보는 것은 우리 자신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자연스러운 일면이다. 그것에 더하여 나와 다른 사람들, 나와 다른 문화, 한국과 전혀 다른 환경들, 한국에서 상상해 보지 못했던 문제와 고난들, 많은 색다른 것들이 나에게 다가오기 시작한다. 익숙하지 않은 것들 또 다른 환경과 남을 통하여 나를 다시 바라보게 되기 시작 한다. 설상 가상으로 외로운 시간도 혼자 있는 시간도 많아 진다.
그러므로 호주 이민자인 우리는 원하든 원치 않든 계속해서 자신을 되돌아 보아야 하는 문제들에 직면하게 된다. 이 이름의 문제를 포함하여 이민은 어찌 보면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이 땅에 왔는가? 바로 우리 모두, 모든 이민자에게 던져진 질문이다. 이 질문 자체가 다름 아닌 신앙에의 질문이기도 하다. 삶과 신앙은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철학자들은 진정한 실존의 의미는 이름에서 부터 시작 된다고 강조한다. 특별히 호주 사회는 다수의 사람들이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문화다. 목사님에게도 “목사님”이라는 말대신에 그냥 이름을 부르고 신학교 교장 선생님에게조차 학생들이 이름을 사용할 뿐 직위를 부르지 않는다. 이 이름 부르는 문화 속에서 어느날 나의 이름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도 영적인 귀로서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큰 축복일까? 하나님께서 그들의 입을 통하여 나의 이름을 부르고 계시는 것은 아닐까?
내가 진정으로 나 자신과 마주하게 될 때 내가 진정으로 홀로를 경험할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와 주신다. 그렇기에 이민의 땅에서, 먼길을 돌아 호주땅에 와서야 비로소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는 간증들이 있는 것이다. 한국이건 호주건 이름있는 교회의 파일에 내 이름과 직위를 올리고 주일날 수많은 자리 중에 하나를 차지하고 온 것 하나로 안심하는 이들이 있다.
나는 유명하신 그 목사님의 이름과 그분을 잘 알지만 정작 그 목사님은 나의 이름과 나에 대하여 또 나의 삶의 필요에 대하여 잘 아는 바가 없는 경우가 허다 하다. 이름을 교적에 올리는 것이 신앙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실존적 만남으로 자신의 이름에 대한 참된 회복이 있어야 한다. 이민의 땅에서 참된 사명을 발견 해야 한다. 믿음의 선조들이 그러 하였던 것처럼.
시드니의 이스트우드 스트라스필드 등지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 옆을 스쳐 지나 갈라 치면 집사님 권사님 목사님이라는 낮익은 호칭들을 듣는 일은 어렵지 않아 보인다. 스트라스필드 광장에 서서 사장님 하고 큰 소리로 부르면 많은 한국 남자들이 일제히 뒤를 돌아다 본다. 직위에 의한 호칭에 많이 익숙해 있는 동방 예의 지국 우리나라 문화의 일면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스타일과는 달리 성경 속에서 보여지는 하나님이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실 때 늘 하시던 것처럼 차포를 띠실 것 같다. 우리의 고유한 이름을 부르기를 선호하시고 그 이름 위에 고유의 사명을 주실 것만 같다. 직위를 부르는 우리 문화가 잘못되었다거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결코 아니지만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을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우리 문화에 감사하는 필자지만) 우리의 신앙은 어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가? 그 질문은 반드시 필요해 보인다.
직위와 외형과 형식에 치우쳐있을지 모를 작금의 일부 한국 기독교의 폐혜를 답습하지 않고 우리가 호주 땅에 까지 와서 추구해야 할 실존적 신앙의 모습은 과연 무엇일까? 우리 모두에게 던져진 질문이다. 호주 이민자로서 우리의 신학과 신앙과 삶에 주어진 과제이다. 우리는 그저 우연히 호주에 왔을까? 아니면 나를 이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섭리와 의도가 있었을까? 그렇다면 내가 살던 땅과는 너무 다른 이곳으로 왜 나를 보내셨을까? 이 땅에 온 우리가 가장 먼저 그 이름의 문제앞에 서서 자문해 보게 된다.
출애굽기 3장에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는 스토리가 나온다. 그 때 모세의 상황은 어떠한 상황이었을까?
모세는 강대국 이집트로 이민온 히브리인 이민 2세 였다. 이민의 땅에서 나이 80에 내 인생이 이걸로 끝인가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인적없는 산속 깊은 곳에서 보리 서말이면 처가 살이도 면한다는데, 자기 양도 아닌 장인의 양을 돌봐주며 늙은 몸둥이에 재산도 없고 명예도 없고 그의 인생은 그저 초라하기 그지없고 아무 것도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지난 과거의 모세의 인생은 어떠 했을까? 파란 만장 그 자체 였다. 그가 늘 목동이었다면 그의 인생이 그러려니 할 법도 한데 한때는 강대국의 왕자 생활도 해봤던 몸이었다. 귀하신 몸으로서 대국의 왕이 될뻔도 했다. 죽을 뻔한 적도 여러번이었다. 지금도 앞에 나서면 어디가서 쥐도새도 모르게 죽임을 당할는지도 모를 일이다. 소위 산전 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고 살았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을까? 중요한 것은 현재 주변에 아무도 없고, 그가 가진것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고 거의 인생 포기하던 상황이었다는 점이다.
바로 그때 그 장면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의 이름을 부르셨다는 얘기다. 하나님의 음성이 모세의 귀에 들렸다는 것이다. 모세야! 모세야!
모세의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은 바로 그 때 였다는 것이다. 이 순간을 위하여 지난 그 모든 삶의 사건과 경험들이 있었던 것이다. 모세야! 모세야!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는 그 순간 부터 모세만의 진정한 인생, 가장 위대한 모세의 삶, 영원으로 향하는 진정한 모세의 영광의 삶이 시작 되었던 것이다.
모세의 인생은 자신이 완전히 인생을 포기해 버렸던 바로 그 때부터 진정한 인생의 시작이 있었는지 모른다. 아니 자신을 완전히 버리고 부인해야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호주에 와서 겪게되는 여러 한계와 외로움 앞에 우리는 한국에서 예상치 못했던 고통을 겪게 되는 때가 많이 있다. 지금 하나님께서 이 이민의 상황에서 겪게 된 이 많은 눈물과 고통 그리고 절박함과 외로움 속에서 나의 이름을 부르고 계시지는 않은가? 나의 인생이 지금까지의 이런 나의 삶의 경험과 이런 이민 생활의 모습 끝에서 결국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에게 드러 내시기위한 섭리였던 것은 아닐까? 우리는 이 호주 땅에서, 그리고 고달픈 우리의 이민 생활의 하루 하루 시간들 속에서 깊이 있게 자문해 보아야 한다.
내가 아는 하나님이 정말 모세와 하나님과의 관계속에 드러난 그런 하나님인가? 호주 이민자들인 우리는 항상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 당신은 저를 아십니까?
이민의 땅에서…, 새로운 땅에서…, 고난의 땅에서…,
오늘, 지금 여기, 조용히 나의 이름을 부르시는 하나님을 만나본다.
큰빛 장로교회 이지훈 목사 (rheelight@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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