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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끊어진 순간에 울리는 단 하나의 선율
[영혼의 미술관] 짙은 안개가 깔린 푸른빛과 회색조의 몽환적인 화폭 안으로 가만히 걸음을 옮겨 봅니다. 그곳에는 두 눈을 수건으로 단단히 가린 한 여인이 거대한 지구 위에 위태롭게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습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막막함 속에서 여인의 품에 안긴 것은 낡은 나무 수금(Lyre)입니다. 가슴 아프게도 수금을 이루던 탄탄한 줄들은 모두 툭툭 끊어져 버렸고, 이제 형태를 유지하는 것은 단 하나의 줄뿐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절망하여 악기를 내던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지막 남은 그 한 줄을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튕기며, 거기서 흘러나오는 아주 미세한 선율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수금에 바짝 귀를 갖다 대고 있습니다. 깊은 슬픔이 배어 있는 듯한 푸른빛의 공간은 역설적이게도 여인의 웅크린 모습과..
평범한 일상 속으로 스며든 고요한 은혜
[영혼의 미술관] 미술관의 한구석,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그림 한 점이 있습니다. 화려한 금빛 후광도, 천사들의 비상(飛上)도 없는 이 그림 앞에서는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고요해집니다. 미국 출신의 화가 가리 멜처스(Gari Melchers)가 그린 입니다. 자신이 속해 있던 당대 예술계의 화려한 문법과 번잡한 도시를 뒤로한 채, 멜처스는 네덜란드의 작은 어촌 마을로 스며들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거대하고 장엄한 성당이 아닌, 가장 낮은 자들이 모인 단출한 시골 예배당의 뒷자리에 조용히 앉았습니다. 그림 속 풍경은 그가 바라본 따뜻한 시선 그 자체입니다. 꾸밈없는 나무 의자에 앉은 사람들의 투박한 옷차림 위로, 창문을 통해 들어온 은은한 자연광이 조용히 내려앉습니다. 화면 중앙에는 맑은 푸른색 옷을 ..
가장 남루한 식탁에 찾아온 빛, 엠마오의 그리스도
[영혼의 미술관] 어느 낡고 허름한 19세기 프랑스 농가의 부엌,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공간에 따스한 빛이 은은하게 스며듭니다.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하루의 고단한 노동을 마친 두 농부가 투박한 나무 식탁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흙먼지가 잔뜩 묻은 낡은 작업복, 밭을 일구느라 마디가 굵어지고 거칠어진 손. 그들은 성경 속 거룩한 사도들이라기보다는, 당장이라도 우리 곁에서 마주칠 법한 지친 이웃의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남루한 식탁의 한가운데, 눈부신 금빛 후광 대신 지극히 소박하고 평온한 얼굴을 한 분이 빵을 떼어 나누고 계십니다. 이 경이롭고도 따뜻한 작품은 19세기 프랑스의 자연주의 화가 레옹 오귀스탱 레르미트(Léon Augustin Lhermitte)가 그린 입니다. 평..
십자가 위에서 내려다본 세상
[영혼의 미술관] 미술관의 고요한 공기 속에서 한 그림 앞에 섰을 때, 우리는 종종 예상치 못한 시선과 마주치게 됩니다. 보통의 십자가 그림이라면 으레 고통받는 예수님의 얼굴이나 상처 난 몸을 밖에서 바라보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19세기 프랑스 화가 제임스 티소(James Tissot)의 작품 앞에서는 우리의 위치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림을 보는 순간, 관람자는 어느새 허공에 매달려 있습니다. 시선을 아래로 향하면 화면 맨 밑바닥에 커다란 못이 박혀 피 흘리는 두 발이 간신히 보일 뿐입니다. 우리는 지금,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의 시선으로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 파격적이고도 압도적인 구도를 탄생시킨 화가 제임스 티소의 삶은 이 그림만큼이나 극적인 반전을 품고 있습니다. 본래 그..
북유럽 숲속에 찾아온 은혜, 알베르트 에델펠트의 '그리스도와 막달라 마리아'
서늘하고도 맑은 가을 공기가 코끝을 스치는 듯합니다. 하얀 수피를 자랑하는 자작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고요한 숲속, 그 사이로 난 투박한 흙길 위에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여인은 무릎을 꿇은 채 얼굴을 감싸 쥐고 애통하게 울부짖고 있으며, 그 앞에는 낡은 옷을 입고 맨발로 선 한 남자가 부드러운 시선으로 여인을 내려다봅니다. 핀란드의 화가 알베르트 에델펠트(Albert Edelfelt)가 남긴 명화, 이 우리에게 건네는 첫 장면입니다. 19세기 후반, 핀란드 미술을 세계적인 반열에 올려놓은 외광파 화가 에델펠트는 이 작품을 통해 아주 놀라운 혁신을 시도했습니다. 2천 년 전 중동의 뜨거운 사막과 예루살렘의 돌길 위에서 벌어졌던 성서의 사건을, 자신이 살아가는 핀란드의 척박하고도 아름다운 자연 속으로 ..
거대한 세상의 그늘에서 안식하는 참된 빛
짙고 푸른 어둠이 내려앉은 광활한 이집트의 사막, 서늘한 밤공기 속에서 숨죽인 듯한 정적이 흐릅니다. 19세기 프랑스의 아카데미즘 화가 뤼크올리비에 메르송(Luc-Olivier Merson)은 이 적막하고도 신비로운 사막의 한가운데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역사와 종교라는 전통적인 주제에 자신만의 이국적이고 고고학적인 상상력을 더해 환상적인 화풍을 선보였던 그는, 명화 을 통해 성서의 오랜 서사를 완전히 새로운 시각적 감동으로 재창조해 냈습니다. 헤롯왕의 끔찍한 영아 학살을 피해 쫓기듯 고향을 떠나온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갓 태어난 아기 예수.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거대하고 위압적인 스핑크스의 두 발등 사이에서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는 깊은 잠에 빠져 있습니다. 화면의 좌측에는 금방이라도 꺼질 듯한 희미한..
어둠 속의 빛, 세속의 권력 앞에 선 진리
전통적인 성화 속에서 우리는 대게 영광스러운 후광과 눈부신 빛에 둘러싸인 예수님의 모습을 마주하곤 합니다. 그러나 19세기 러시아의 사실주의 화가 니콜라이 게(Nikolai Ge)가 우리 앞에 내어놓은 캔버스는 그 익숙한 기대를 완전히 전복시킵니다. 그림의 제목은 《진리란 무엇인가? (What is Truth? Christ and Pilate)》. 화면 중앙을 가로지르는 눈부신 햇빛은 질문을 던지는 권력자 빌라도의 뒷모습을 화려하게 비추고 있지만, 정작 온 우주의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화면 구석의 깊고 짙은 그림자 속에 홀로 서 계십니다. 니콜라이 게는 당대 러시아 정교회의 화려한 종교화 전통을 거부했던 인물입니다. 대문호 톨스토이의 깊은 영향을 받았던 그는, 금빛으로 덧칠해진 신화 속의 예수가..
평범한 일상에 드리워진 구원의 그림자
나무 톱밥이 흩날리는 비좁은 목공소,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창문 틈으로 늦은 오후의 붉은 햇살이 깊숙이 스며듭니다. 고된 하루의 노동을 마친 젊은 목수가 허리를 펴고 일어납니다. 뻐근한 몸을 풀기 위해 두 팔을 활짝 벌려 기지개를 켜며 하늘을 우러러보는 그의 눈빛에는, 육신의 깊은 피로와 함께 알 수 없는 거룩한 갈망이 서려 있습니다. 이토록 생생하고 인간적인 예수님의 모습을 화폭에 담아낸 이는 영국의 화가 윌리엄 홀먼 헌트(William Holman Hunt)입니다. 라파엘전파의 핵심 멤버였던 그는 기독교 신앙을 예술로 구현해야 한다는 맹렬한 소명 의식을 품고 있었습니다. 헌트는 성경의 사건을 그저 서양의 익숙한 상상력으로 그려내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먼지 날리는 2천 년 전의 현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