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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위에서 내려다본 세상
[영혼의 미술관] 미술관의 고요한 공기 속에서 한 그림 앞에 섰을 때, 우리는 종종 예상치 못한 시선과 마주치게 됩니다. 보통의 십자가 그림이라면 으레 고통받는 예수님의 얼굴이나 상처 난 몸을 밖에서 바라보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19세기 프랑스 화가 제임스 티소(James Tissot)의 작품 앞에서는 우리의 위치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림을 보는 순간, 관람자는 어느새 허공에 매달려 있습니다. 시선을 아래로 향하면 화면 맨 밑바닥에 커다란 못이 박혀 피 흘리는 두 발이 간신히 보일 뿐입니다. 우리는 지금,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의 시선으로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 파격적이고도 압도적인 구도를 탄생시킨 화가 제임스 티소의 삶은 이 그림만큼이나 극적인 반전을 품고 있습니다. 본래 그..
북유럽 숲속에 찾아온 은혜, 알베르트 에델펠트의 '그리스도와 막달라 마리아'
서늘하고도 맑은 가을 공기가 코끝을 스치는 듯합니다. 하얀 수피를 자랑하는 자작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고요한 숲속, 그 사이로 난 투박한 흙길 위에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여인은 무릎을 꿇은 채 얼굴을 감싸 쥐고 애통하게 울부짖고 있으며, 그 앞에는 낡은 옷을 입고 맨발로 선 한 남자가 부드러운 시선으로 여인을 내려다봅니다. 핀란드의 화가 알베르트 에델펠트(Albert Edelfelt)가 남긴 명화, 이 우리에게 건네는 첫 장면입니다. 19세기 후반, 핀란드 미술을 세계적인 반열에 올려놓은 외광파 화가 에델펠트는 이 작품을 통해 아주 놀라운 혁신을 시도했습니다. 2천 년 전 중동의 뜨거운 사막과 예루살렘의 돌길 위에서 벌어졌던 성서의 사건을, 자신이 살아가는 핀란드의 척박하고도 아름다운 자연 속으로 ..
거대한 세상의 그늘에서 안식하는 참된 빛
짙고 푸른 어둠이 내려앉은 광활한 이집트의 사막, 서늘한 밤공기 속에서 숨죽인 듯한 정적이 흐릅니다. 19세기 프랑스의 아카데미즘 화가 뤼크올리비에 메르송(Luc-Olivier Merson)은 이 적막하고도 신비로운 사막의 한가운데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역사와 종교라는 전통적인 주제에 자신만의 이국적이고 고고학적인 상상력을 더해 환상적인 화풍을 선보였던 그는, 명화 을 통해 성서의 오랜 서사를 완전히 새로운 시각적 감동으로 재창조해 냈습니다. 헤롯왕의 끔찍한 영아 학살을 피해 쫓기듯 고향을 떠나온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갓 태어난 아기 예수.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거대하고 위압적인 스핑크스의 두 발등 사이에서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는 깊은 잠에 빠져 있습니다. 화면의 좌측에는 금방이라도 꺼질 듯한 희미한..
어둠 속의 빛, 세속의 권력 앞에 선 진리
전통적인 성화 속에서 우리는 대게 영광스러운 후광과 눈부신 빛에 둘러싸인 예수님의 모습을 마주하곤 합니다. 그러나 19세기 러시아의 사실주의 화가 니콜라이 게(Nikolai Ge)가 우리 앞에 내어놓은 캔버스는 그 익숙한 기대를 완전히 전복시킵니다. 그림의 제목은 《진리란 무엇인가? (What is Truth? Christ and Pilate)》. 화면 중앙을 가로지르는 눈부신 햇빛은 질문을 던지는 권력자 빌라도의 뒷모습을 화려하게 비추고 있지만, 정작 온 우주의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화면 구석의 깊고 짙은 그림자 속에 홀로 서 계십니다. 니콜라이 게는 당대 러시아 정교회의 화려한 종교화 전통을 거부했던 인물입니다. 대문호 톨스토이의 깊은 영향을 받았던 그는, 금빛으로 덧칠해진 신화 속의 예수가..
평범한 일상에 드리워진 구원의 그림자
나무 톱밥이 흩날리는 비좁은 목공소,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창문 틈으로 늦은 오후의 붉은 햇살이 깊숙이 스며듭니다. 고된 하루의 노동을 마친 젊은 목수가 허리를 펴고 일어납니다. 뻐근한 몸을 풀기 위해 두 팔을 활짝 벌려 기지개를 켜며 하늘을 우러러보는 그의 눈빛에는, 육신의 깊은 피로와 함께 알 수 없는 거룩한 갈망이 서려 있습니다. 이토록 생생하고 인간적인 예수님의 모습을 화폭에 담아낸 이는 영국의 화가 윌리엄 홀먼 헌트(William Holman Hunt)입니다. 라파엘전파의 핵심 멤버였던 그는 기독교 신앙을 예술로 구현해야 한다는 맹렬한 소명 의식을 품고 있었습니다. 헌트는 성경의 사건을 그저 서양의 익숙한 상상력으로 그려내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먼지 날리는 2천 년 전의 현실..
실패한 자리를 덮는 은혜의 빛
짙은 어둠이 깔린 공간, 작은 촛불 하나가 일렁이며 한 남자의 얼굴을 극적으로 비춥니다. 무언가에 쫓기는 듯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눈동자, 두려움과 내면의 갈등이 뒤섞인 주름진 얼굴,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방어하듯 들어 올린 손. 이 노인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스승과 함께 죽는 자리까지 가겠다고 호언장담했던 수제자 베드로입니다. 불을 쬐던 하녀의 가벼운 질문 하나에, 그는 덜덜 떨며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고 맙니다. 네덜란드의 거장 렘브란트 판 레인(Rembrandt van Rijn)이 그린 은 단순히 성경 속 한 장면을 재현한 그림이 아닙니다. 이 그림을 그릴 당시 렘브란트는 화려했던 암스테르담 제일의 초상화가라는 과거의 영광을 모두 잃어버린 상태였습니다. 아내 사스키아와 아들 티투스 등 사랑하는 가족..
절망의 연못에 찾아온 자비
어둡고 차가운 돌기둥의 주랑 아래, 무거운 침묵과 짙은 그늘이 내려앉아 있습니다. 그 서늘한 바닥에 38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병마에 시달린 한 사내가 체념한 듯 누워 있습니다. 뼈만 남은 앙상한 몸짓과 빛을 잃어버린 눈동자는 그가 견뎌온 절망의 무게를 고스란히 전해줍니다. 그러나 이 잿빛 풍경 속에서 우리의 시선을 강렬하게 사로잡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병자의 몸을 덮고 있는 붉은 천입니다. 주변의 어둠과 대비되는 이 붉은색은 마치 살고 싶다고 소리치는 그의 고통스러운 비명 같기도 하고, 메말라버린 생명력에 대한 간절한 갈급함 같기도 합니다. 이토록 깊은 슬픔과 연민을 캔버스에 담아낸 이는 덴마크의 화가 칼 블로흐(Carl Bloch)입니다. 예수의 생애를 다룬 23점의 성화 연작으로 유명한 그는..
침묵의 제단 위에 놓인 지극한 사랑: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의 <하나님의 어린 양>
수르바란의 '하나님의 어린 양' 정적만이 감도는 어두운 방, 차가운 돌 제단 위에 하얀 뭉치 하나가 놓여 있습니다. 자세히 다가가 보니 그것은 갓 태어난 듯 순결한 어린 양입니다. 네 발은 가느다란 끈에 묶여 있고, 생명의 온기가 아직 남아 있는 듯 부드러운 털은 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납니다. 스페인의 거장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이 그린 '하나님의 어린 양'은 우리를 그 어떤 거창한 설교보다 깊은 묵상의 세계로 초대합니다. 수르바란은 평생을 수도원의 정적 속에서 보낸 화가였습니다. 그는 화려한 색채나 역동적인 움직임 대신,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예리한 관찰력과 절제된 표현을 선택했습니다. 그가 이 작품을 그릴 당시, 스페인은 종교적 열정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였습니다. 수르바란은 단순히 성경의 한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