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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보기 →노량진의 추억
글/ 미셀 유 (글벗세움문학회 회원, 서양화가)

30여 년 만에 오르는 노량진 언덕길은 아직도 꾸불꾸불 가파르게 펼쳐져 택시 운전사의 불평이 귀에 꽂혔다. 가네 못 가네 한참을 실랑이했지만, 결국 꼭대기까지 올라와 택시 운전사에게 웃돈을 쥐어주고 커다란 철제 정문 앞에 섰다. 한국에 올 때면 간간이 밖에서 뵙곤 하던 큰어머니가 몸져누으신 지 오래되었다는 소식에 늦기 전에 찾아뵙는 길이었다.
여기가 맞는 것 같은데... 호주로 이민을 간 후에는 한 번도 발길을 할 기회가 없었던 노량진은 너무도 변해서 이곳이 그곳인가 가물거리는 기억을 다잡았다. 정문을 지나자 그 넓던 마당과 옥수수밭은 다 어디로 가고, 우중충한 회색 시멘트벽으로 무장을 한 5층 빌라 세 채가 우뚝 서서 나를 맞았다.
큰아버지가 이북에서 피난을 내려와 전쟁 통에 몇 년을 구르며 손에 쥔 돈으로 마련한 것이 이 노량진 땅이었다. 비록 노량진 꼭대기에 위치했지만 1,000평이 넘는 대지에 적산가옥을 끼고 산 이 집은 큰아버지의 피와 땀의 결정체였고 한씨 가문의 구심점이 되었다.

명절이면 큰집과 작은집이 모여 왁자지껄 음식을 만들곤 했는데, 우람한 몸집의 큰어머니가 며느리들을 데리고 커다란 목소리로 지시를 하던 모습이 어린 내가 보기에도 마치 전쟁을 지휘하는 장군 같아서 '헤' 하고 입을 벌리곤 했었다. 명절 때마다 엄마 손을 붙들고 와 밤새 음식을 만드는 곁에서 칭얼거리기도 하고, 낮에는 오빠들과 옥수수랑 토마토 심어놓은 밭에 나가 잠자리 잡는 것도 구경하곤 했었는데....
초등학교 내내 방학 때면 우리 형제들은 큰집으로 와 큰집 식구들과 함께 지내곤 했었다. 아들이 일곱 명에 딸이 하나인 큰집은 늘 북적거렸다. 위로 셋은 장가를 가 근처로 분가를 했지만, 주말이면 모두 모여 함께 지냈다. 막내 뻘인 나는 오빠들 뒤를 졸졸 쫓아다니다가 넘어져서 울면 오빠들이 번갈아 가면서 업고 뛰어다녔다. 저녁에 식구들이 평상에 앉아 수북이 쌓인 옥수수와 고구마를 먹는 동안 언니랑 둘이 마당에 핀 봉숭아로 손톱에 물을 들이기도 했다. 봄이면 앞마당에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 색색 가지 크레용으로 꽃을 그려 벽마다 붙여 놓고 겨울에는 집 앞 비탈길 옆 공터에서 썰매를 타고....
그러나 앞에 보이는 광경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이 새록새록 이어지는 추억을 가로막았다. 지나간 모든 것이 사라진 회색 벽 건물들을 보자 무언가 배신당한 것 같은 느낌에 울컥했다.
앞 동 현관 앞에 넷째 오빠가 마중을 나와 큰어머니가 계신 아래층 집으로 들어갔다. 방에는 내가 오랜만에 온다고 오빠들이 네 명이나 와서 반겨주었다. 넓은 대지에다 빌라를 지어 모두 모여 살자는 것은 큰아버지의 뜻이었다.
내가 꽃밭이랑 옥수수밭이 없어져서 섭섭하다고 했더니 "그래, 세월이 그만큼 흘렀으니 모든 게 변했지. 그래도 다들 위아랫집에 살아 모이는 건 일도 아니니 좋아. 가끔은 복닥거려 귀찮기도 하지만...." 막내 오빠가 웃으며 말했다.
자리에 누워 눈을 감고 있던 큰어머니가 "아이고, 우리 명숙이 왔니? 어케 먼 길을 왔어..." 하며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반겨주셨다. 계단에서 굴러 한동안 거동을 못 하시던 큰어머니는 눕기가 무섭게 여러 가지 합병증이 와 2년이 넘도록 자리보전을 하고 계셨다. 여든이 넘는 나이에도 푸짐한 체구에 정정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쪼그라들어 이불 속으로 사라질 것만 같았다. 두툼했던 손이 앙상하게 뼈가 드러난 모습이 너무 허망해 저절로 눈물이 솟아올랐다.
겨울방학에 큰집에 가면 밤마다 옛날 얘기 해달라고 큰어머니를 조르곤 했다. 그러면 큰어머니는 군밤을 까 입에 넣어주며 이북에서 농사짓던 얘기나 아이들 여섯 명을 데리고 전쟁 통에 평양에서 부산까지 죽기 살기로 피난 오신 얘기를 들려주었다.
"여섯이나 되는 놈들 먹이고 건사하느라 정신없이 지냈어도 다섯째가 가기 전엔 그래도 살만했어. 디프테리아가 뭔지를 내가 아나. 자꾸만 목에 머리카락이 걸린 것 같다고 목을 쥐어뜯어도 열이 펄펄 나 온몸이 불덩이가 돼도 병원을 갈 수 있나 약을 구할 수 있나."
6.25 때 이야기를 하다간 죽은 다섯째 아들 생각에 눈물을 훔치셨다.
그리곤 굵은 손가락으로 언니의 긴 머리칼을 빗어주며 말씀하시곤 했다. "니 오래비 잃고 가슴 한쪽이 뻥 뚫려 매일 찬바람에 시려웠는데, 그때 온 게 너야. 그러니까 우리 정희는 먼저 간 오래비 몫, 니 몫까지 복이 두 배지." 염불 외듯이 외던 그 말씀대로 언니는 결혼을 잘해 아들 딸 낳고 떵떵거리며 살고 있다.
저녁을 먹으며 이 얘기, 저 얘기 나누던 나는 그만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까무룩이 졸다가 깨다가 하며 내 손을 붙잡고 놓지 않았던 큰어머니도 이제 색색 편안한 숨을 내쉬며 깊이 잠드셨다. 부침이 많은 세월을 사는 동안 온갖 풍상을 물결에 흘려보내고, 잔잔한 호수가 되어 자리를 지킨 큰어머니. 오빠들이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지난 세월의 추억들.... 과거의 잔상은 허공에 잠시 머물다 이내 바람을 타고 멀어져 갔다. 빈자리에 큰어머니의 주름진 얼굴이 무언가 할 일을 다 한 자의 만족감이랄까, 이제는 쉬고 싶은 자의 편안함이랄까, 세월을 이겨낸 아름다움으로 빛나고 있었다.
현관문을 나서니 옆 동이랑 뒤쪽 동 창문마다 불이 켜져 환한 불빛 속에서 저녁을 먹거나 TV를 보는 가족들의 모습이 보였다. 첫인상과 달리 따스함이 묻어나는 정경을 보며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모두 사람 사는 모습이지. 내 추억이 뭔 상관이야. 가슴에 새겨놓은 게 그대론데... 이렇게 모여 살면 그게 행복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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