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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보기 →머무는 사랑을 잃어버린 시대

학창 시절 필수 독서 가운데 한 권이었던 ‘어린 왕자’는 흔히 동화로 분류되지만, 그 실체는 절대 가볍지 않다. 이 작품은 동화의 외피를 두른 이야기이기 이전에, 상실을 통과한 한 인간이 시대의 폐허 한가운데서 토해낸 피 섞인 고백에 가깝다. 어린이를 위해 쓰인 듯 보이지만, 정작 이 이야기가 겨냥하는 독자는 삶의 무게를 이미 감당해 본 어른들이다. 순수함을 잃어버린 세계를 향해, 그리고 인간다움을 상실한 시대를 향해,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는 가장 부드러운 언어로 가장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이 문장은 감상적인 문구가 아니다. 보이는 것에 집착하던 시대를 향한 조용한 항의이자, 파괴의 한가운데서 인간다움을 붙들기 위한 마지막 윤리적 선언에 가깝다. 전쟁의 소음 속에서 태어난 이 한 문장은, 오늘날 관계가 너무 쉽게 소비되고 사랑이 너무 빠르게 증발하는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으로 남아 있다.
무엇이 정말 중요한가, 우리는 지금 무엇을 보지 못하고 있는가?” 이 질문은 단순한 문학적 수사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향한 근본적인 성찰의 요청이다. 어린 왕자가 말하는 사랑은 빠르게 소모되는 감정이 아니라, 시간을 들여 길들고 책임을 감수하는 관계였다. 사랑은 순간의 강도가 아니라, 머무는 능력이며, 관계 안에 자신을 내어주는 결단이었다. 이러한 사랑 이해는 놀랍게도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바울이 제시하는 사랑의 사상과 깊이 맞닿아 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 1절에서 3절에 이르기까지, 당시 신앙 공동체 안에서 가장 탁월하다고 여겨질 수 있었던 인간의 능력과 영적 성취를 열거한다. 곧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 “예언하는 능력”,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아는 것”, 그리고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다. 이 목록은 단순한 은사 나열이 아니라, 인간이 도달할 수 있다고 상상하는 언어적·지적·영적 역량의 최고 정점을 총체적으로 가리킨다.
그러나 바울의 논지는 이러한 탁월함을 찬미하는 데 있지 않다. 그는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의 절대적 우선성을 선언한다. 인간적 최고치와 천상적 최고치를 병치함으로써, 아무리 뛰어난 언어 능력과 영적 표현, 신앙적 확신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사랑이 모자랄 때 그것은 의미를 생산하지 못하고, 관계를 세우지 못하며, 공동체를 살리지 못하는 공허한 종교적 소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바울에게 사랑은 은사를 장식하는 덕목이 아니라, 은사를 존재하게 하는 조건이자 삶을 삶답게 살아 움직이게 하는 근원적 힘이었다. 사랑이 빠진 은사는 기능할 수 있을지언정 생명을 담지 못하며, 관계를 만들 수 있을지언정 공동체를 살리지 못한다. 그러므로 사랑은 선택할 수 있는 미덕이 아니라, 인간의 삶이 의미를 갖기 위해 반드시 요청되는 본질이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사랑의 본지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사랑은 그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사랑은 여전히 말해지지만, 더 이상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친밀함은 갈망 되지만, 부담은 회피된다. 관계는 깊어지기 전에 관리의 대상이 되고, 불편함이 커지는 순간 정리의 언어로 치환된다. 그 결과 사랑은 가벼워졌지만, 역설적으로 상처는 더 자주, 더 깊게 남는다. 이러한 변화는 개인의 성향 문제라기보다, 사랑을 둘러싼 시대적 구조의 변화에 가깝다. 사랑은 더 이상 견뎌야 할 관계가 아니라, 선택할 수 있는 경험이 되었고, 머물러야 할 약속이 아니라 언제든 철회할 수 있는 옵션이 되었다. 이 흐름을 설명하기 위해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오늘의 사랑을 ‘액체 사랑’이라 불렀다.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상황에 따라 흘러가며, 책임을 최소화하려는 사랑—바로 이 액체화된 사랑의 구조 속에서, 우리는 왜 사랑을 말하면서도 더 외로워지는지를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민자의 사랑은 다음과 같은 차원에서 액체 사랑에 머물러 있을 가능성이 구조적으로 높다고 말할 수 있다. 첫 번째로 디아스포라의 삶은 본질적으로 ‘머무름이 흔들리는 경험’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국경을 넘는 순간,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던 언어와 규칙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고, 오랫동안 의지해 왔던 돌봄의 네트워크 역시 느슨해진다. 이 균열의 공간에서 사랑은 이전보다 더 절실하게 요청되지만, 동시에 그 지속을 감당하기에는 지나치게 불안정한 조건 속에 놓인다. 그 결과 이민자의 사랑은 종종 깊어지기 전에 가벼워지고, 가까워지기 전에 안전거리부터 설정된다. 체류 신분의 불확실성, 경제적 압박, 언어 장벽이라는 조건부 삶은 개인의 일상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방식에도 스며든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사랑은 더 이상 영구적 약속으로 이해되기보다, 상황에 따라 선택되고 철회될 수 있는 관계로 인식된다. 결국 사랑은 시작은 빠르되, 불편함과 갈등 앞에서는 쉽게 철수하는 액체적 성격을 띠게 된다. 두 번째, 감정의 압축과 소진으로 인한 빠른 친밀감과 잦은 상처 때문이다. 낯선 환경에서의 고립은 종종 빠른 친밀감을 유도한다. 관계는 생존의 필요로 급속히 가까워지지만, 이러한 친밀함은 충분히 길들여질 시간을 갖지 못한 채 형성되는 경우가 많다. 상호 이해와 신뢰가 축적되기 전에 결합된 사랑은, 갈등 앞에서 더욱 쉽게 균열을 드러낸다. 이때 발생하는 상처는 관계의 구조적 한계로 해석되기보다 개인의 실패로 내면화되고, 그 결과 자기 비난과 정서적 회피가 반복된다. 감정은 빠르게 소진되고, 관계는 더 조심스러워진다.
셋째로 공동체의 취약화이다. 공동체의 취약화란 공동체가 더 이상 사람을 붙들어 주고 견뎌 주는 구조로 기능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겉으로는 모임이 있고, 예배가 있고, 프로그램도 유지된다. 그러나 공동체는 문제가 발생하는 순간 그 취약성이 드러난다. 갈등 앞에서 충분히 기다려 주지 못하고, 불편함을 감당하기보다 회피를 선택하며, 상처 입은 사람을 끝까지 품어 내지 못한다. 그 결과 공동체는 외형적으로는 존재하지만, 정작 위기의 순간에 기대어 설 수 없는 구조가 된다. 다시 말해, 이는 사람들 속에 있으되 사람을 지탱하지는 못하는 공동체, 곧 버팀목으로 기능하지 못하는 공동체의 자화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교회 공동체의 사랑과 돌봄은 때로 헌신의 언어가 아니라 만족의 언어로 평가된다. 머무는 돌봄보다 프로그램의 효율과 기능성이 앞설 때, 관계는 유지될 수는 있으나 깊어지지 않는다.
그 결과 사랑은 헌신의 실천이 아니라 관리할 수 있는 서비스로 전환되고, 공동체는 정서적 안전망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드나드는 소비가 가능한 공간으로 축소된다. 이러한 현상은 개인의 성숙 부족이나 신앙의 결핍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 바우만이 이미 지적했듯, 유동성은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시대의 구조다. 흥미롭게도 성경 역시 디모데후서 3장에서 비슷한 진단을 내린다. 바울은 말세의 징후를 설명하며, 사회 전반에 나타날 관계의 붕괴와 사랑의 왜곡을 핵심 특징으로 제시한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기보다 더” 하게 되고, 그 결과 관계는 헌신보다 자기 보존을 중심으로 재편된다. 디모데후서 3장에서 묘사되는 인간상은 공동체적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는 모습이다. 감사할 줄 모르고, 무정하며, 화해하지 않으려 하고, 배신과 회피를 반복한다.
이는 사랑이 사라졌다기보다, 사랑이 자기중심적 욕망과 즉각적 만족의 방향으로 유동화된 상태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 바울이 말한 말세의 징후는 사랑의 부재가 아니라 사랑의 구조적 변질이다. 이 점에서 디모데후서 3장은 바우만의 액체 근대 분석과 깊이 맞닿아 있다. 사랑은 더 이상 관계를 유지하는 힘이 아니라, 개인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헌신은 부담으로, 머무름은 위험으로 인식된다. 바울이 경고한 말세의 모습은 특정 시점의 종말 신호라기보다, 관계와 사랑이 유동화된 시대가 반복적으로 만들어 내는 인간 군상에 대한 통찰로 읽을 수 있다. 이 지점에서 고린도전서 13장이 제시하는 아가페 사랑은 단순한 종교적 이상이나 도덕적 훈계가 아니라, 액체화된 시대를 향한 급진적인 대안으로 드러난다. 바울이 말한 사랑은 감정의 강도나 즉각적 만족을 약속하지 않는다.
대신 오래 참고, 쉽게 철수하지 않으며, 관계를 끝까지 감당하는 힘으로 묘사된다. 액체 사랑은 지금의 만족을 살지만, 아가페는 기다림과 지속의 시간을 요구한다. 무엇보다 아가페는 사랑의 중심을 자기 보호에서 자기를 내어주므로 전환한다. 액체 사랑의 핵심 정서는 자기중심의 안전이다. 상처받지 않기, 잃지 않기, 무너지지 않기. 그러나 십자가에서 드러난 아가페는 사랑이 가장 위험해 보이는 자리에서 가장 실제적인 형태를 취한다. 사랑이 고체화되는 순간은, 사랑이 가장 무거워지는 순간이다. 그래서 아가페는 사랑을 억압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랑이 흩어지지 않도록 책임, 언약, 시간이라는 무게를 부여한다. 액체 사랑이 자유를 말하며 관계를 가볍게 만든다면, 아가페는 자유를 관계 안에 묶어 사랑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게 만든다.
오늘의 시대가 사랑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면, 어쩌면 우리는 사랑을 너무 가볍게 만들어 버린 것은 아닐까. 이 질문 앞에서 아가페는 여전히 불편한 대안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바로 그 불편함 속에서, 사랑은 다시 머무를 수 있는 형태를 얻는다. 아가페는 액체 사랑을 굳혀 버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흘러가지 않도록 존재의 자리에 세워 둔다. 이것이 아가페가 액체 사랑을 ‘고체화’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은 액체 근대의 흐름에 순응하는 사랑이 아니라, 그 흐름에 저항하는 사랑이다. 쉽게 떠날 수 있는 시대 한복판에서 떠나지 않음을 선택하는 사랑, 상처의 가능성을 제거하기보다 상처를 감수하며 함께 머무는 사랑—이 아가페야말로 액체 사랑이 남긴 공허와 상처를 넘어설 수 있는 신학적 자원이다. 사랑이 다시 고체화되지 않는 한, 공동체는 버팀목이 될 수 없고, 삶은 소음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이 점에서 바울이 말한 사랑은 과거의 교훈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가 가장 절실히 요청하는 대안적 삶의 방식이다.
글쓴이: 박만경 목사(시드니 우림교회 담임, Iona Trinity College 상담학 교수, 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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