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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 신앙: 연민을 회복하는 공동체

OCJ|2026. 1. 15. 17:58

 

연민(compassion)이라는 단어는 요즘 우리의 언어생활에서 좀처럼 사용되지 않는다. 입에 올리기에는 어딘가 낯설고, 말하는 순간 이미 한 시대를 뒤로 물러난 듯한 울림을 남긴다.

 

그것은 연민이 낡아서가 아니라, 그 단어가 머물 자리를 우리의 삶이 잃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연민은 너무 오래 사용되지 않아 먼지가 쌓인 단어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먼지는 시간의 탓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방식이 남긴 흔적이다.

 

우리는 서로의 상처 앞에 오래 머무는 법을 잊었고, 타인의 고통을 내 삶의 일정 속에 들여놓는 일을 점점 어려워하게 되었다. 연민은 여유를 요구하지만, 우리의 일상은 늘 급했고, 연민은 기다림을 요청하지만 우리는 늘 서둘렀다. 나부터 살고 보자는 말은 생존의 지혜처럼 들리지만, 어느새 삶을 지배하는 유일한 원칙이 되었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는 우리를 보호하는 방패처럼 보였지만, 동시에 타인의 고통이 닿지 않도록 만드는 두꺼운 벽이 되었다. 그 벽 너머에서 누군가 울고 있어도, 우리는 그것을 소음처럼 처리하는 법에 익숙해졌다. 그사이 연민은 조용히 밀려났다.

 

연민은 본래 계산하지 않고, 성과를 묻지 않으며, 현재의 이익을 요구하지 않는 언어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 언어를 이 땅에서 사용할 줄 몰라, 하늘의 언어를 땅에 묻어버렸다.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말이 많아질수록 마음은 가벼워지고, 연결이 늘어날수록 고독은 깊어지는 기묘한 풍경이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후서 3장에서 묘사한 말세의 징후를 연민의 관점에서 읽으면, 그것은 윤리의 붕괴라기보다 연민의 상실에 가깝다. 인간이 사랑해야 할 대상을 잃어버릴 때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은 규범이 아니라, 타자의 고통 앞에 멈추어 서는 능력이다.

 

자기 자신을 사랑의 중심에 두는 삶은 결국 타인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전락시키고, 그 결과 인간은 무정하고 조급하며 관계를 소모하는 존재가 된다. 바울이 경고한 삶의 질서 전도란, 바로 이 지점하나님과 이웃을 향해야 할 사랑이 자기애로 뒤틀릴 때 나타나는 연민의 마비 상태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말세의 문제는 세상이 너무 악해졌다는 데 있지 않다. 그것은 연민을 잃어버린 인간이 서로의 고통을 감당하지 못하고, 더 이상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지 못하게 된 상태에 대한 신학적 진단이다. 이 진단은 오늘의 시대와 깊이 맞닿아 있다. 현대 사회는 인간에게 끊임없는 반응을 요구하며, 속도와 판단, 분노와 규탄을 미덕처럼 훈련한다. 그 결과 연민은 비효율로 취급되고, 용서는 약함으로 오해되며, 기다림은 무능의 징표처럼 여겨진다.

 

디모데후서 3장이 던지는 질문은 분명하다. 우리는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사랑은 우리를 더 인간답게 만드는가, 아니면 더 사나워지게 만드는가. 그러므로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더 날카로운 판단이 아니라, 연민을 회복하는 공동체다.

 

즉각 반응하는 문화에 맞서 잠시 멈추고, 상처 입은 인간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용서와 오래 참음을 다시 삶의 중심에 두는 공동체 말이다. 바울의 경고는 절망의 선언이 아니라, 인간다움을 회복하라는 요청이며, 그 회복의 이름이 바로 연민이다.

 

이 요청은 이민자의 삶에서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조국을 떠나온 이민자들은 다문화의 한복판에서 익숙함과 낯섦이 뒤섞인 혼성성의 삶을 살아간다. 그 과정에서 반복되는 타자성의 경험은 사소해 보이는 일들마저 깊은 상처와 트라우마로 증폭시킨다.

 

체류의 문제에서부터 생존을 위한 노동과 공급, 관계의 재구성에 이르기까지, 이민자의 삶은 대부분을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과제들로 채워져 있다. 도움을 요청하기에는 언어가 부족하고, 기대어 쉴 공동체를 찾기에는 삶은 너무 빠르게 흘러간다.

 

그렇게 우리는 사람들 속에 섞여 살면서도, 실상은 누구보다 고독한 사회를 살아간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이민자에게 필요한 것은 더 강해지는 법만이 아니다. 오히려 서로의 사정을 묻고, 사소한 아픔에도 귀 기울이며, 나도 같은 길을 걸어왔다고 말해 줄 수 있는 관계의 온기다.

 

그래서 이민자 공동체에는 경쟁보다 연대가, 판단보다 이해가, 무관심보다 연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연민은 흔히 감정으로 이해된다. 누군가의 고통을 보며 마음이 움직이는 것, 불쌍히 여기는 마음, 혹은 순간적으로 솟아오르는 동정심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연민을 지나치게 얕은 차원에 머물게 한다. 카렌 암스트롱과 안셀름 그륀은 공통으로 이 지점에서 멈추지 않는다. 두 사람 모두 연민을 감정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훈련된 태도, 다시 말해 결단의 문제로 이해한다. 암스트롱은 그의 저서 상처 주지 않을 결심에서 연민을 이렇게 재정의한다.

 

연민이란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감정이 아니라, 나는 상처 주지 않겠다는 반복적 선택이며 삶의 방향을 규정하는 윤리적 훈련이라는 것이다. 그는 특히 타인을 향한 연민이 결코 자기 자신을 건너뛸 수 없다고 강조한다.

 

자신을 가혹하게 판단하고 끊임없이 정죄하는 사람은, 결국 타인에게도 같은 잣대를 들이대게 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안셀름 그륀의 영성적 통찰은 암스트롱의 윤리적 주장을 한층 더 깊은 차원으로 이끈다. 그륀은 자기 연민을 자기합리화 또는 자기중심성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의 한계와 상처, 불완전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기 수용의 태도이다. 그는 단호하게 말한다. 자기를 수용하지 못하고 거부하는 사람은 타인을 진정으로 연민할 수 없다. 자기 안의 연약함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은, 타인의 연약함 앞에서도 결국 판단과 거리 두기로 반응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두 사상가의 관점을 나란히 놓고 보면, 하나의 분명한 구조가 드러난다. 연민은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감정이 아니라, 안에서 바깥으로 흘러가는 태도이다. 자기 자신을 대하는 방식이 곧 타자를 대하는 방식이 된다.

 

자기혐오와 자기 부정 위에 세워진 연민은 오래가지 못한다. 그것은 쉽게 도덕적 우월감이나 구원자 콤플렉스로 변질하거나, 소진 속에서 무너진다. 반대로 자기 연민과 자기 수용 위에 세워진 연민은, 타자의 고통을 끝까지 견디게 하는 힘이 된다.

 

자기 연민은 연민의 약화나 후퇴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연민이 자기 안에서 고여 왜곡되거나 소진되지 않고, 타인을 향해 흘러갈 수 있도록 열어 주는 첫 번째 통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민자의 삶에서 연민은 선택할 수 있는 미덕이나 고상한 윤리 이상이 아니다. 그것은 서로를 무너지지 않게 붙들어 주는 최소한의 태도이며, 고립과 상실, 반복되는 실패 속에서도 인간다움을 지켜 내는 생존의 감각이다. 연민이 사라진 자리에는 경쟁과 비교, 침묵과 단절이 남고, 결국 공동체는 조용히 붕괴한다.

 

글쓴이: 박만경목사(시드니 우림 교회 담임, Iona Trinity College 상담학 교수, Ph.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