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DAY'S WORD

시편 16편 5-6절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Today
Admin

뉴스

더보기 →
오피니언/기고

더 좋은 삶을 살기 위한 산책

OCJ|2026. 1. 24. 08:39

2026년에 출간된 아담 필립스(Adam Phillips)‘The Life You Want, 당신이 원하는 삶은 이 책을 읽는 독자에게 삶의 방향을 다시 성찰하게 만드는 문제작이다.

 

이 책에서 영국의 정신분석학자 아담 필립스(Adam Phillips)좋은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여 온 좋은 삶의 정의가 얼마나 많은 오해와 착각 위에 서 있는지를 차분히 해체해 나간다.

 

필립스는 무엇보다도 좋은 삶을 목표 달성이나 행복의 극대화로 동일시하는 통념에 이의를 제기한다.

 

좋은 삶이란 어떤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소유하거나 성취하는 상태를 의미하지 않으며, 더 많은 만족과 안정에 도달하기 위한 노력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좋은 삶을 완결된 상태가 아닌, 지속적인 질문의 과정으로 이해한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사람들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자기 계발에 과도하게 몰두하며, 스스로 끊임없이 몰아붙인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 계발의 논리는 종종 인간 존재에 대해 하나의 은밀한 전제를 강화한다. 지금의 나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라는 잠정적인 의식이다. 이 전제가 반복될수록 삶은 더 이상 경험과 형성의 여정이 아니라, 결핍을 진단하고 보완해야 하는 지속적 과제가 된다.

 

성장은 삶을 살아내는 방식이 아니라, 삶에 참여하기 위한 조건으로 변질하고, 인간은 현재의 자신을 승인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미래의 자신에게로 유예된다. 그 결과 삶은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준비 중인 상태로 남게 되며, 자기 계발은 성숙의 도구라기보다 자기 부정이 제도화된 메커니즘으로 작동하게 된다. 신앙의 영역에서도 이러한 결핍 보완 논리는 낯설지 않다.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더 좋은 신앙인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점검한다. 기도가 줄어들었을 때, 말씀에 집중하지 못했을 때, 감정적으로 흔들릴 때조차 그것은 인간의 한계나 삶의 무게로 이해되기보다 믿음의 부족으로 해석된다.

 

신앙은 위로와 안식의 자리가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평가받는 영적 훈련장이 된다. 하나님 앞에서도 인간은 충분한 존재가 아니라, 아직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 존재로 머문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신앙의 본질과도 어긋난다. 성경이 말하는 성숙은 결핍의 제거가 아니라, 결핍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서는 용기와 관련된다. 그렇다면 Adam Phillips가 제시하는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아담 필립스는 이 질문에 대해 여러 조건을 제시하지만, 이 지면에서는 그 핵심 가운데 하나인 좋은 삶은 자기 계발이 아니라 자기 수용이라는 명제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아담 필립스에게서 좋은 삶은 더 나아진 내가 되는 삶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의 나를 끊임없이 수정하고 개선해야 할 미완의 대상으로 취급하는 태도와 거리를 두는 삶이다. 오히려 좋은 삶이란 이미 존재하고 있는 나의 상태와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는 삶,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 수용하는 태도에서 시작된다.

 

그가 말하는 자기 수용이란 자기 합리화나 자기만족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내 안에 있는 긍정적 자원뿐 아니라 부정적 감정, 결핍, 모순, 불안, 실패의 기억까지도 나의 일부로 인정하는 태도를 뜻한다. 필립스는 이러한 수용이야말로 인간을 살아 있게 만드는 조건이라고 본다.

 

인간은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형성 중인 존재이며, 좋은 삶이란 그 형성의 과정을 억지로 통제하거나 가속화 하지 않고 견뎌낼 수 있는 능력에 가깝다. 이러한 통찰은 칼 융의 분석심리학, 특히 자기(Self)와 자아(Ego)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 개성화(individuation) 이론과 깊이 맞닿아 있다. 융에 따르면 자아는 의식의 중심이지만 인격 전체의 중심은 아니다.

 

인격의 참된 중심은 의식과 무의식을 포괄하는 전체성의 원리인 자기(Self)에 있다. 문제는 인간이 성장 과정에서 자아를 지나치게 동일시한 나머지, 자기의 요구와 상징을 억압하거나 무시하는 데서 발생한다. 이때 무의식은 동굴처럼 봉인되고, 그 안에 포함된 그림자, 억압된 욕망, 상처 입은 감정들은 의식의 통제 밖에서 왜곡된 방식으로 나타난다.

 

필립스가 말하는 자기 수용은 바로 이 지점에서 융의 개성화 과정과 구조적으로 연결된다. 자기 수용이란 자아가 더 이상 자신을 인격 전체로 착각하지 않고, 자기(Self)의 존재를 인정하며 그 요구에 귀 기울이기 시작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이는 자아가 사라지거나 자기와 융합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융의 이론에서 개성화란 자아와 자기가 같아지는 상태가 아니라, 자아가 자기의 중심성을 인정하고 그 궤도 안으로 들어가는 관계적 재정렬의 과정이다.

 

따라서 자아가 진정한 나에게 다가가 손을 내민다라는 표현은, 칼 융의 말을 빌려서 설명하자면 자아가 무의식의 내용을 배제하거나 억압하지 않고, 그것을 의식의 삶 속으로 통합하려는 태도를 보이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곧 그림자의 통합이며, 자기(Self)가 요청하는 삶의 방향에 자아가 귀를 기울이는 행위이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더 도덕적으로 되거나 더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전체적인 존재가 된다.

 

결국 필립스가 말하는 좋은 삶이란, 융의 언어로 옮기면 자아 중심적 삶에서 자기중심적 삶으로의 이동이며 자기 수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결함을 제거한 삶이 아니라, 결함을 포함한 삶이며, 불안을 통제한 삶이 아니라 불안을 의식 속에서 말할 수 있게 된 삶이다.

 

좋은 삶은 더 나아진 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나의 전체성을 더 이상 부정하지 않는 삶이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인간은 비로소 자기 자신과 화해하며, 삶을 관리해야 할 프로젝트가 아니라 살아갈 수 있는 여정으로 경험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자기수용이 인간에게 가져다주는 강점이 무엇인지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자기 심리학의 창시자인 하인츠 코헛(Heinz Kohut, 19131981)은 인간의 핵심 과제를 자기 응집성의 유지와 회복으로 이해하였으며, 자기 수용을 그 구조적 토대로 보았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자기 수용이 형성된 개인은 실패, 비난, 좌절과 같은 외적 위협에 직면하더라도 자기 구조가 급격히 무너지지 않으며, 타인의 인정 여부에 따라 자존감이 즉각적으로 흔들리지 않는다.

 

또한 이러한 개인은 과도한 인정 욕구나 나르시시즘적 방어를 통해 자기 가치를 보존하려는 경향이 상대적으로 적고, 자신의 불완전함을 존재의 결함이 아니라 인간적 조건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 결과 나는 완벽하지 않아도 존재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다라는 내적 확신이 형성되며, 이는 자기 방어의 약화를 넘어 타인의 취약성과 한계를 공감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정서적·관계적 역량의 확장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기 심리학은 자기 수용을 단순한 태도나 성격 특성이 아니라, 개인이 안정적이고 성숙한 삶을 영위하게 하는 심리적 구조의 핵심 원천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논의는 다양한 문화적 맥락 속에서 살아가는 이민자들의 삶에 특히 중요한 함의를 지닌다. 이민자의 삶은 언어적 한계, 사회적 비교, 문화적 차이로 인해 쉽게 자자기 수용을 어렵게 만든다. 이 과정에서 자기 수용이 안 될 경우, 낮은 자존감과 자기 비난은 구조화되고, 타인의 평가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불안정한 자기 상태가 고착되기 쉽다.

 

반대로 철저한 자기 수용은 이민자가 새로운 사회 속에서도 자기 응집성을 유지하도록 돕는 핵심 심리적 자원이 되며, 비교와 열등감의 악순환을 완화하고, 관계 속에서 자신과 타인을 더욱 온전한 관계에서 만날 수 있는 내적 토대를 제공한다.

 

이러한 점에서 자기 수용은 이민자에게 선택할 수 있는 심리적 태도가 아니라, 정서적 생존과 성숙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필수적 조건이라 할 수 있다.

 

결국 필립스가 말하는 좋은 삶을 기독교적으로 풀어내면, 그것은 더 나은 신앙인이 되기 위한 삶이 아니라, 더 이상 자신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삶이다. 결함을 제거한 뒤에야 허락되는 삶이 아니라, 결함을 안은 채 이미 하나님과 함께 시작된 삶이다.

 

신앙의 성숙이란 완전해짐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더 진실해지는 것이며, 바로 그 자리에서 좋은 삶은 이미 시작되고 있다.

 

글쓴이: 박만경목사(시드니 우림 교회 담임, Iona Trinity College 상담학 교수, Ph.D)

 

'오피니언 > 기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계공졸의 하나님  (1) 2026.01.29
노량진의 추억  (1) 2026.01.24
머무는 사랑을 잃어버린 시대  (0) 2026.01.20
이민자 신앙: 연민을 회복하는 공동체  (0) 2026.01.15
경계선 위의 순례자:  (1) 2026.0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