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더보기 →우주적 도피주의인가, 창조 세계를 향한 청지기적 사명의 역설인가
화성에 도시를 세운다면 Release: 2026-06-15

첨단 우주 기술이 선사할 장밋빛 미래의 이면을 생물학과 사회과학의 교차점에서 예리하게 해부한 수작이다. 지구를 탈출해 화성에 새로운 에덴을 짓겠다는 인류의 거만한 꿈이 지닌 필연적 한계와 허상을 속도감 있게 고발한다.
일론 머스크의 '화성 인구 100만 명 거주'라는 웅대한 선언을 필두로, 전 세계는 다가올 우주 개척 시대의 막연한 기대감에 취해 있다. 처음에는 화성 정착을 위한 실용 가이드북을 쓰려 했던 만화가와 생명과학자 부부는, 4년간의 심층 연구 끝에 이 찬란한 비전이 치명적인 한계에 부딪힌다는 진실과 마주한다.
무중력이 임신과 출산에 미치는 생물학적 재앙, 영토를 둘러싸고 벌어질 잔혹한 법적 분쟁과 자본 독점 등 책은 다양한 렌즈를 통해 우주 이주 프로젝트의 위험천만한 민낯을 낱낱이 파헤친다. 저자들은 지저분해진 방을 치우기 싫다는 이유로 유독성 폐기물 매립지로 이사하려는 인류의 맹목적 도피주의를 통쾌하게 꼬집으며, 결국 인간이 돌아가 회복해야 할 장소는 기술로 쏘아 올린 우주 바벨탑이 아닌 우리가 두 발 딛고 선 이 땅임을 역설한다.
[기술적 유토피아주의와 현대판 바벨탑의 붕괴]
오늘날 실리콘밸리의 거물들과 우주 산업의 선구자들은 화성 이주를 인류의 궁극적인 구원처럼 포장한다. 일론 머스크를 비롯한 억만장자들은 기후 위기와 자원 고갈, 전쟁으로 신음하는 지구를 떠나 화성에 새로운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한다. 그러나 잭 와이너스미스와 켈리 와이너스미스 부부의 저작 『화성에 도시를 세운다면』은 이러한 장밋빛 전망이 철저한 과학적 무지와 맹목적인 기술 낙관주의에 기인하고 있음을 예리하게 폭로한다.
이 책은 철저히 세속적인 과학서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오세아니아 크리스천 저널의 기독교적 관점에서 바라볼 때 이는 현대판 바벨탑의 허상을 허무는 강력한 신학적 경고장으로 읽힌다.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에서 인류가 하늘에 닿아 스스로의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려 했던 것처럼, 현대의 우주 개척주의자들은 첨단 과학 기술이라는 새로운 벽돌과 거대한 로켓이라는 역청을 통해 창조주가 부여하신 피조물의 한계를 벗어나려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저자들이 조목조목 짚어내는 생물학적, 의학적, 경제적 한계들은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하는 메시아가 될 수 없음을 증명하는 명백한 장치들이다. 하나님이 정하신 창조의 경계를 철저히 무시한 채, 독성 물질인 과염소산염으로 겹겹이 뒤덮여 있고 지구 대기 밀도의 단 1퍼센트에 불과한 척박한 행성에서 새로운 에덴동산을 세우겠다는 발상은 극명한 지적 교만에 불과하다. 이 책은 고도의 기술력이 결코 인류의 원초적 불안과 존재론적 타락의 위기를 해결하는 구원자가 될 수 없다는 묵직한 진실을 동시대인들에게 뼈아프게 일깨워 준다.
[흙으로 지어진 인간의 실존적 한계와 체화된 영성]
이 책이 독자들에게 안겨주는 가장 흥미로우면서도 충격적인 폭로는 우주 공간과 다른 낯선 행성에서 인간의 생존, 그중에서도 특히 '임신과 출산'이라는 생명 잉태의 과정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는 생물학적 분석에 있다. 저자들은 미소중력 환경과 막대한 우주 방사선 노출이 인체의 장기와 세포를 어떻게 치명적으로 파괴하는지 매우 상세하고도 집요하게 기술하며, 화성에서의 인위적인 번식이 얼마나 끔찍한 기형이나 영아 사망과 같은 비극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 강력하게 경고한다.
이는 기독교적 인간론의 가장 뼈대가 되는 '흙으로 지음 받은 존재(창세기 2장 7절)'로서의 인간의 실존을 뼈저리게 상기시키는 대목이다. 인간은 단순히 고기능의 정보 처리 장치가 아니며, 육체를 마음대로 초월하여 뇌의 데이터만으로 우주를 유랑할 수 있는 영지주의적 존재나 트랜스휴머니즘의 산물이 결코 아니다.
우리의 연약한 몸은 지구 특유의 중력, 대기의 구성 성분, 자기장의 두터운 보호, 그리고 흙 속의 무수한 미생물 생태계와 매우 긴밀하고도 필연적으로 상호작용하도록 정교하게 창조되었다. 다른 우주 행성으로 이주하려 할 때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치명적인 신체적, 유전적 결함들은, 역설적이게도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을 이 지구라는 고유한 토양과 완벽한 환경에 철저히 맞춤화하여 지으셨음을 강력하게 반증하는 과학적 증거라 할 수 있다.
육체의 근원적 한계를 강제로 벗어나 화성으로의 극단적 탈출을 꿈꾸는 것은 몸의 신성한 가치를 폄하하는 현시대의 악한 이원론적 사고와 깊이 맞닿아 있다. 현대 크리스천은 이 책의 차가운 생물학적 고발을 통해 우리의 몸이 창조주의 세밀하고 다정한 섭리 아래 놓여 있으며, 이 땅에 단단히 발을 딛고 살아가는 체화된 영성(Embodied Spirituality)이야말로 하나님이 의도하신 인간다움의 변할 수 없는 본질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매우 깊이 자각하게 된다.
[새로운 행성, 그러나 여전히 낡은 죄의 본성]
거대한 자본과 기술을 동원하여 화성이라는 새로운 영토가 열린다면, 인류는 과연 그곳에서 지구의 모든 갈등을 잊고 완벽하고 평화로운 유토피아적 사회를 구축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저자들은 화성이라는 완전히 미지의 공간에서도 필연적으로 영토 분쟁, 한정된 자원에 대한 극단적 독점, 그리고 노동력 착취와 폭력이라는 정치적, 법적 갈등이 끔찍하게 재현될 것임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이는 지구 바깥 우주에 자급자족하는 독립된 사회를 만들면 인간의 어두운 과거를 깨끗이 청산하고 새로운 인류 역사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는 세속적 휴머니즘의 오만한 허구성을 산산조각 낸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지리적 위치나 환경의 결핍에서 비롯된 문제가 아니라, 인간 영혼의 가장 깊은 중심에 도사리고 있는 지독한 본성의 문제다. 아담과 하와 이후 철저히 타락한 인류는 아무리 고도의 기술적 진보를 이룩하고 수천만 킬로미터나 떨어진 다른 행성으로 이주한다고 할지라도, 그들 내면에 깊이 각인된 이기심, 교만, 그리고 탐욕이라는 무거운 죄의 짐을 우주선에 고스란히 싣고 갈 수밖에 없다.
책에서 예견하는 화성 현지에서의 복잡한 법적 다툼과 생존을 건 치열한 권력 투쟁은, 결국 화성 역시 우주 복장을 입은 인간들의 또 다른 폭력과 억압의 무대로 전락할 것임을 강력히 시사한다. 새로운 행성이 우리에게 결단코 새로운 마음이나 인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현재 우리 지구가 처한 총체적 위기의 근본 원인은 자원의 절대적 부족이나 환경 자체의 변화에 앞서 인간의 뿌리 깊은 영적 타락과 이기심에 기인한다.
따라서 엄청난 자본이 투입되는 화성 이주 프로젝트는 인류의 죄악을 일거에 희석시키는 환상적인 '리셋 버튼'이 될 수 없으며, 진정한 인류 사회의 회복과 변혁은 장소의 이동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통한 심령의 전인격적 변화에서만 시작된다는 불변의 기독교적 진리를 이 책의 비관적인 전망 속에서 우리는 더욱 선명하게 확인하게 된다.
[도피주의를 넘어 창조 세계를 향한 청지기적 부르심으로]
과학적 탐구의 끝에서 저자들이 내린 최종적인 결론은 과학책의 범주를 넘어 대단히 묵직하고도 실용적이다. 그들은 '기후변화에 시달리는 지구를 떠나 화성에 가겠다는 건 지저분한 방을 떠나 굳이 유독성 폐기물 매립지로 이사해 살겠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일갈한다. 이 서늘한 문장은 단지 화성 이주의 과학적, 경제적 실효성을 따지는 수준을 넘어서서, 현재 인류가 직면한 전 지구적인 생태적, 도덕적 책임을 기술을 핑계로 회피하려는 현대 문명을 정면으로 꾸짖는 선지자적 경고와도 같이 울려 퍼진다.
성경은 분명하게 선포한다. 하나님께서 하늘은 자신의 거룩한 처소로 삼으셨지만 땅은 사람에게 주시며(시편 115편 16절), 그 땅을 아름답게 경작하고 지혜롭게 돌보라는 최초의 문화 명령(창세기 2장 15절)을 우리에게 부여하셨다. 현재 지구 공동체가 겪고 있는 끔찍한 생태적 위기와 깊은 사회적 혼란 앞에서 우리 크리스천들이 취해야 할 합당하고 성경적인 태도는 결코 우주로의 비겁한 도피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상처 입고 탄식하며 신음하는 창조 세계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회복시키고 치유하는 청지기적 사명을 눈물로 재발견하는 것이다. 망가진 지구를 마치 고장 난 기계처럼 버려두고 화성이라는 생명 없는 불모지로 도망치려는 헛된 욕망 이면에는, 이 타락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구속 역사의 소망을 함부로 포기해 버리는 치명적인 영적 패배주의가 도사리고 있다. 참된 기독교의 종말론은 세상으로부터의 도피나 파괴가 아니라, 창조 세계의 완전한 구속과 새 하늘과 새 땅의 찬란한 도래를 향해 굳건히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척박한 화성에 소수 억만장자들의 새로운 제국을 건설할 헛된 궁리를 하기 전에, 먼저 우리에게 조건 없이 주어진 유일하고 아름다운 에덴동산, 즉 이 상처 입은 지구를 하나님의 거룩한 창조 질서에 맞게 돌보고 생명을 살리는 땀 흘리는 노동에 우리 자신과 교회를 온전히 내어드려야만 할 것이다.
기독교적 세계관의 렌즈로 볼 때, 『화성에 도시를 세운다면』은 무신론적 기술 유토피아주의와 맹목적인 우주적 도피주의에 젖어 있는 현대 문명에 경종을 울리는 묵직한 변증서로 작용한다. 수많은 현대인들이 환경 파괴와 인류 문명의 붕괴를 두려워하며, 첨단 과학과 우주 개척이 우리를 멸망에서 건져낼 새로운 메시아라고 굳게 맹신한다.
그러나 저자들은 철저히 세속적이고 과학적인 분석을 통해 창조주께서 설정하신 자연법칙과 생물학적 한계를 인간이 결코 자의적으로 뛰어넘을 수 없음을 명증하게 보여준다. 이는 창세기 2장에 선포된 '흙으로 지음 받은 존재'로서의 인간의 피조성과 유한성을 뼈저리게 자각하게 만든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지구라는 정교하고 아름다운 생태계 속에서만 온전히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도록 설계하셨다. 척박하고 생명 없는 화성으로 도피하여 완벽한 세계를 구축하려는 인류의 시도는, 타락한 죄의 본성을 해결하지 못한 채 죄의 오염과 권력의 투쟁을 우주적 차원으로 확장하려는 현대판 바벨탑 프로젝트에 불과하다.
진정한 구속은 장소의 회피나 기술적 초월에 있지 않다. 현대 크리스천들은 이 책을 통해 신음하는 창조 세계를 폐기물처럼 버리고 떠나려는 헛된 트랜스휴머니즘적 욕망을 분별해야 한다. 나아가, 깨어지고 망가진 이 땅을 인내심을 가지고 치유하며 회복의 빛을 비추라는 태초의 '문화 명령(Cultural Mandate)'과 청지기적 사명을 다시금 거룩하게 짊어져야 할 것이다.
하늘은 여호와의 하늘이라도 땅은 사람에게 주셨도다 (시편 115:16)
'문화 > 도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107세의 현자가 묻다, "알고리즘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당신의 영혼은 누구의 지시를 받고 있는가?" (1) | 2026.06.21 |
|---|---|
| 자아의 정상을 넘어, 타인과 맞닿은 헌신의 봉우리로 (0) | 2026.06.20 |
| 경계 밖으로 밀려난 자들의 곁에 선 사도, 혐오의 시대를 넘어설 전복적 복음을 말하다 (0) | 2026.06.17 |
| "대우받고자 하는 대로 대우하라", 그 익숙함에 갇힌 복음의 정수를 깨우다 (0) | 2026.06.13 |
| "그건 은혜로 하는 겁니다"... 바울의 은혜 신학에서 발견한 목회와 공동체의 회복 (0) | 2026.06.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