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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도서

"그건 은혜로 하는 겁니다"... 바울의 은혜 신학에서 발견한 목회와 공동체의 회복

OCJ|2026. 6. 12. 05:44

오늘날 많은 교회와 목회자들이 인간관계의 갈등과 사역의 피로감 속에서 길을 잃고 방황한다. 특히 이민 사회의 고단함과 다문화적 환경 속에서 치열하게 분투하는 오세아니아 지역의 한인 교회 공동체들 역시 예외는 아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가장 큰 숙제이자 고통이 되어버린 시대, 우리는 과연 어떻게 교회를 지키고 사역을 이어가야 할까? 최근 한국 교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도서 《은혜란 무엇인가》와 이를 둘러싼 한 목회자의 진솔한 고백은, 우리가 잃어버렸던 '은혜'의 참된 본질과 공동체의 가치를 다시금 일깨워주고 있다.

 


남용되는 '은혜'의 참된 의미를 찾아서


우리는 일상에서 '은혜'라는 단어를 매우 쉽게 사용하곤 한다. 예배나 찬양이 감격스러울 때도, 설교가 마음에 와닿을 때도, 혹은 예상치 못한 행운이나 좋은 결과를 얻었을 때도 은혜라는 표현을 쓴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인 뉘앙스의 남용 속에서 정작 은혜가 지닌 신학적 깊이와 성경적 본질은 가려지기 쉽다.

신간 《은혜란 무엇인가 - 쉽게 풀어 쓴 바울의 은혜신학》(김형태 지음, IVP 펴냄)은 세계적인 신약학자 존 M. G. 바클레이(John M. G. Barclay)의 은혜 연구를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쉽게 풀어낸 책이다. 저자인 김형태 목사(주님의보배교회)는 스승인 바클레이 교수의 지도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학문적 논쟁에 머물던 바울의 은혜 신학을 실제 성도들의 삶과 교회 공동체에 적용할 수 있도록 공을 들였다.

바울이 말한 은혜의 속성과 '순환성'


바클레이 교수는 오늘날과 성경 속에서 은혜(선물)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맥락을 크게 여섯 가지로 분류하는데, 이 책은 그중 바울서신에 등장하는 은혜의 핵심 속성 네 가지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1. 우선성(Priority): 자격이나 조건을 따지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시는 은혜를 뜻한다.
2. 초충만성(Superabundance): 우리의 필요와 상상을 뛰어넘어 한없이 흘러넘치는 은혜이다.
3. 비상응성(Incongruity): 아무런 자격이 없는 자에게 거저 주어지는 은혜를 의미한다.
4. 유효성(Efficacy): 단순히 감정적 위로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삶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능력으로 역사하는 은혜이다.

특히 이 책이 던지는 가장 강력한 도전은 은혜의 '순환성(Circularity)'에 있다. 현대인들은 대가를 바라지 않고 거저 주는 것(비순환성)만을 참된 은혜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한 은혜는 결코 일방통행으로 끝나지 않는다. 디트리히 본회퍼가 경고했던 '값싼 은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은혜는 반드시 다른 사람과 공동체를 향해 흘러가야 한다는 '순환성'을 지닌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신 은혜가 선순환되는 구체적인 통로와 공간이 바로 '공동체', 즉 교회인 것이다.

"그건 은혜로 하는 겁니다" — 관계의 갈등을 이기는 힘


최근 목회적 고민과 사람으로 인한 우울감에 시달리던 홍동우 목사(《교회답지 않아 다투는 우리》 저자)는 이 책을 읽으며 깊은 회복을 경험했다고 고백했다. 그는 사역을 하면서 결코 사랑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사람들을 마주할 때마다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면 어떻게 목회를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홍 목사는 이 책의 후반부인 '순환성'과 '공동체' 단원을 읽으며 신학교 시절 선배 목회자에게 들었던 조언을 떠올렸다. 당시 당회 문제로 힘들어하던 초보 담임목사에게 한 선배는 "목사님, 그건 은혜로 하는 겁니다"라고 조언했다. 당시 홍 목사는 그 말을 '원칙 없이 사람 눈치 보며 처세하는 것'으로 오해해 거부감을 느꼈다.

그러나 바울의 은혜 신학을 통해 깨달은 진실은 달랐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은 내 의지나 성품이 아니라 오롯이 하나님의 은혜 덕분이다. 목회자는 누군가를 무조건 사랑해야만 하는 의무를 지닌 존재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이미 조건 없는 사랑을 풍성히 받은 수혜자라는 사실이다. 교회는 바로 그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끊임없이 순환하는 은혜의 현장이다. 홍 목사는 마침내 오랜 질문에 대해 "그건 정말로 은혜로 하는 것"이라는 고백으로 답을 얻었다고 전했다.

[EDITOR'S NOTE]
이민과 다문화라는 독특하고도 외로운 목회적 환경을 지닌 오세아니아 지역의 한인 교회들 역시 갈등과 피로감으로 몸살을 앓을 때가 많습니다. 사역자들과 성도들은 종종 '원칙'과 '타협' 사이에서 갈등하며 영적으로 지쳐갑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진짜 은혜는 값싼 타협도, 무조건적인 참음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받은 과분한 사랑을 이웃과 공동체 속에서 정직하게 유통하는 '순환의 능력'입니다. 내가 먼저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을 받은 자임을 기억할 때, 우리는 비로소 나를 힘들게 하는 이웃을 품을 수 있는 은혜의 통로가 됩니다. 오세아니아의 모든 교회 공동체가 상처와 갈등을 넘어, 하나님의 은혜가 멈추지 않고 흐르는 건강한 선순환의 공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