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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보기 →떠나왔지만 떠나지 못한 고국
글쓴이: 박만경목사(시드니 우림 교회 담임, Iona Trinity College 상담학 교수, Ph.D)

고국을 떠나 타향에 정착해 살아가는 이방인들의 삶은 늘 이중의 시간 속에 놓여 있다. 몸은 낯선 땅에서 하루의 생계를 꾸려가지만, 마음 일부는 여전히 고국을 향해 열려 있다. 그래서 우리는 신문과 방송, 유튜브를 통해 흘러오는 한국의 소식에 웃기도 하고, 때로는 말없이 고개를 떨군다. 그러나 요즘 들려오는 소식들은 마음을 가볍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무겁게 가라앉힌다. 여야를 막론하고 반복되는 정치인 보좌관 폭행과 비리, 그리고 권력을 앞세운 착취의 이야기는 한두 번의 사건이 아니라 구조적 피로처럼 다가온다. 문제는 사건의 충격보다도, 그 사건들이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분노와 실망은 잠시 치솟았다가 곧 무력감으로 가라앉고, 책임을 묻는 목소리는 소음 속에 묻혀 버린다.
이방인의 자리에서 바라본 대한민국의 현실은, 누군가의 편을 드는 싸움이라기보다 신뢰가 서서히 닳아가는 과정처럼 보인다. 정의가 선언되는 말은 많지만, 그것이 삶의 현장으로 스며드는 속도는 더디기만 하다. 그런데도 고국을 향한 마음을 완전히 거둘 수 없는 이유는, 이 땅이 여전히 우리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손뼉 칠 일 앞에서는 기뻐하고, 부끄러운 소식 앞에서는 남몰래 눈물을 삼킨다. 조선 시대 이전과 조선 시대의 철학·종교적 전통 속에는 인간과 우주, 신에 대한 다양한 사상이 존재했으며, 그중 일부는 인간의 존엄과 우주적 의미를 강조하는 철학적·윤리적 통찰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러한 전통적 사상은 기독교가 조선에 전해 내려오기 이전부터 조선 사람들의 세계관과 인간관에 영향을 끼쳤다.
특히 “인내천(人乃天, 사람은 곧, 하늘이다)”과 같은 인간 중심적·우주적 일체 사상은 조선 후기 동학, 천도교 전통에서 정교화되어 나타났는데, 이 개념은 인간과 하늘,·우주적 원리의 근원적 연결을 강조하는 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는 단순히 종교적 교리가 아닌 인간의 내재적 존엄성과 평등성, 우주적 일체성에 대한 인식이라고 볼 수 있다. 동학이 말한 인내천(人乃天) 사상은 단순한 민중 구호가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라는 선언이었고, 신분과 권력, 제도와 계급을 넘어 모든 인간의 존엄을 하늘의 자리로 끌어올린 급진적 윤리였다. 그러나 오늘의 대한민국 정치 현실을 바라보면, 이 인내천의 정신은 산산조각이 나서 땅에 떨어진 듯 보인다. 국민을 섬기라고 위임된 권력이 오히려 사람을 소모하고, 침묵시키고, 착취하는 구조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여. 야 국회의원 보좌관 착취 문제는 단순한 개인의 인성 문제나 몇몇 정치인의 일탈로 치부하기 어렵다. 그 안에는 권력을 ‘섬김’이 아니라 ‘지배’로 이해하는 왜곡된 정치 문화가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다. 업무의 과중함, 인격적 모욕, 사적인 심부름, 구조적 침묵 강요는 명백히 사람을 ‘하늘’이 아니라 ‘도구’로 취급하는 행태다. 대한민국 정치 언어에서 가장 남용되고, 동시에 가장 모욕당하는 단어는 국민이다. 여야를 막론하고 국회의원들은 이 단어를 주문처럼 반복한다. 그러나 그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국민’은 더 이상 주권자를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장식 어이자,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한 면죄부에 가깝다. 국민을 말할 때 그들은 고개를 들고, 국민 앞에 서야 할 때는 고개를 돌린다. 폭행, 착취, 갑질, 권한 남용이 드러나도 징계는 늘 솜방망이다.
국회 윤리위는 존재하지만 작동하지 않고, 정당의 자정 능력은 동료를 감싸는 기술로만 발휘된다. 법 위에 군림하는 특권 의식이 없다면, 이런 반복된 무책임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이쯤 되면 묻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정말 국민을 섬기는 정치인가, 아니면 국민 위에 군림하는 정치인가. 국민을 주권자로 대하지 않고 정치의 연료처럼 소모하는 행태는 민주주의의 외피를 쓴 권위주의에 불과하다. 국민은 선거철에만 소환되고, 평소에는 무시된다. 표가 필요할 때는 ‘국민의 뜻’을 외치고, 책임을 물을 때는 ‘정치적 공방’ 뒤에 숨는다. 더 위험한 것은 이 위선이 구조화되었다는 점이다.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제도의 관성이다. 말로는 국민을 존중한다고 하지만, 실천으로는 국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두려움이 사라진 권력은 반드시 타락한다. 국민을 향한 경외심이 없는 정치는 이미 권력을 사유화한 정치다.
국민이라는 단어를 이렇게 쉽게, 이렇게 무책임하게 사용하는 정치라면 차라리 그 단어를 입에 올리지 말라. 국민은 구호가 아니라 심판자다. 정치가 국민을 두려워하지 않는 순간, 그 정치는 이미 국민을 배신한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 정치의 문제는 표현의 과격함이 아니라, 양심의 실종이다. 성경은 이러한 현실을 결코 중립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예언자 아모스는 가난한 자를 밟고 제도를 통해 이익을 취하는 권력을 향해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했고, 야고보는 품꾼의 삯을 떼어먹는 부자들의 죄악이 이미 하늘에 고발되었다고 말한다. 성경에서 착취는 관리의 실패가 아니라 신앙의 붕괴다. 더욱 뼈아픈 지점은, 이러한 현실 앞에서 교회와 신앙 공동체가 얼마나 선택적 침묵이란 만행을 저질러 왔느냐는 질문이다.
많은 한국 교회와 신앙 공동체는 공적 문제 앞에서 선택적 침묵이라는 가장 무거운 죄를 저질러 왔다. 타자가 불의와 폭력을 저질렀을 때는 목소리를 높여 정의와 분노를 외치다가도, 같은 유형의 불공정과 부당히 내 편, 내 교파, 내 정치적 지지 세력에서 나타나면 놀랍도록 조용해진다. 이 선택적 정의 또는 침묵적 카르텔은 비단 개인의 부덕이 아니라, 공동체적 습관이자 구조적 실수이다. 우리 잘 알듯이 대한민국에는 여·야 국회 내 인권위원회가 존재하고, 교파마다 윤리 위원회가 설치되어 있지만, 그 작동 원리는 놀랍도록 닮아있다. 이들의 실제 기능은 정치적 포획(political capture)에 따라 마비된 것이다. 관건은 존재 여부가 아니라 일관성(consistency) 여부이다.
정의를 말할 때는 조심스럽고, 권력의 남용을 비판할 때는 신중함이라는 이름으로 침묵 뒤로 물러서는 것이 현실이 되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신다. 마태복음 23:4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예수님의 진노에 대한 방향은 책임은 아래로 전가하고 특권은 자신의 배를 채우며 고통은 아래 사람에게 전가하는 자를 향하여 있다. 이는 오늘날 공적 정의를 말하면서 사적 관계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지도자에 대한 심판과 경고의 말씀이다. 국회의 보좌관은 정치 시스템의 주변부 인력이 아니다. 그들은 오늘의 정치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정직한 거울이다. 그들을 대하는 태도 속에 그 정치인의 민주주의 이해가 드러나고, 그 사회의 인간관이 고스란히 반영된다.
필자는 평생을 한낮 목회만 해 온 이민 교회 목회자이기에 정치에 대해 말하는 데 익숙하지도, 능숙하지도 않다. 정치적 언어와 전략에 있어서는 오히려 무례한 사람에 가깝다. 그러나 고국 대한민국의 국회의원들에게서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이른바 ‘망국병’의 징후를 바라보며, 그 원인을 성경의 역사 속에서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성경은 언제나 정치 이전에 영적 붕괴의 원인을 먼저 묻기 때문이다. 그 답은 이사야 선지자의 날 선 외침 속에 이미 제시되어 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만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내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사 1:3). 이 말씀은 단순한 종교적 무지가 아니다. 이는 주인을 상실한 공동체의 비극에 대한 선언이다. 이스라엘의 문제는 제도의 부재가 아니라, 주권의 왜곡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누구의 소유인지, 누구 앞에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인지를 망각했다.
주인을 잃은 백성은 필연적으로 권력을 사유화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지도자는 백성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야훼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된 순간, 이스라엘의 왕들과 지도자들은 정의를 사사로이 다루었고, 약자를 착취했으며, 책임을 회피했다. 예언자들이 그렇게 집요하게 정치 권력을 향해 외쳤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것은 정치 비판이 아니라 주권 회복을 향한 신학적 경고였다. 오늘 대한민국 정치에서 목도되는 병리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국민을 입에 달고 살면서도 국민을 두려워하지 않는 ‘국민의 무게’가 현저히 가벼워졌다는 데 있다. 여기서 말하는 국민의 무게란, 국민이 정치권력을 실제로 제어하고 심판할 수 있는 실질적 존재로 인식되는가 하는 문제다. 국민이 두려움의 대상일 때 정치는 절제되고, 국민이 부담으로 작동할 때 권력은 자신을 스스로 통제한다.
그러나 오늘의 정치에서 국민은 더 이상 무거운 존재가 아니다. 국민은 여론조사 수치로 환원되고, 선거 국면에서만 동원되는 추상적 집합명사가 되었다. 정치, 책임보다는 계산이 앞서는 권력, 윤리보다 생존이 우선하는 구조는 결국 주인을 잃은 정치의 전형적인 증상이다. 국민이 주권자라는 헌법적 선언은 남아 있으되, 실제 정치의 심장부에서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나라가 무너지는 첫 징후는 외적 침략이 아니라, 주인을 알아보지 못하는 영적 혼미다. 정치가 타락하는 이유는 제도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두려움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야훼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공동체는 결국 어떤 형태로든 사람 위에 사람을 세우게 된다. 이사야의 외침은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오늘을 비추는 거울이다. 소와 나귀조차 아는 주인을 잃어버린 정치, 그것이야말로 성경이 말하는 망국의 시작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상황이 반복되면서 정치 윤리의 기준 자체가 낮아진다는 점이다. 과거라면 즉각 퇴출당하였을 사안들이 이제는 ‘정치 공방’이나 ‘과장된 비판’으로 치환된다. 국민이 분노해도 정치권은 움직이지 않는다. 이는 국민이 참을 것이라는 확신, 다시 말해 국민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오만이 구조화되었음을 의미한다. 결국 오늘의 정치적 만행은 우발적 일탈이 아니라, 국민의 무게가 사라진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한 결과다. 국민이 다시 무거워지지 않는 한, 정치는 절대 가벼워지지 않는다. 민주주의의 회복은 제도의 개선 이전에, 정치권력이 다시 국민 앞에서 떨게 만드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정치는 결국 사람의 얼굴을 회복하는 일이어야 한다. 권력은 위에서 군림하는 자리가 아니라, 아래에서 떠받치는 자리다. 사람을 밟고 올라선 권력은 오래가지 못한다. 성경도, 역사도, 우리의 경험도 그렇게 증언해 왔다. 인내천이 무너진 자리에서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한다. 이 정치는 과연 사람을 하늘로 대하고 있는가, 아니면 또 다른 도구로 소비하고 있는가. 그 질문 앞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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