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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보기 →김종환 박사 시니어 칼럼 9 정년 퇴임학
30년 넘게 직장생활을 한 김 집사는 정년을 맞아 동료들의 축하를 받으며 직장을 떠났다. 송별식에서는 꽃다발과 기념품을 받았다. 동료들은 “이제 여행도 하고 편히 쉬십시오”라고 인사했고, 김 집사도 웃으며 “이제 좀 쉬어야지요”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퇴임 후 처음 맞은 월요일 아침, 그는 평소처럼 일찍 눈을 떴다. 출근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옷을 갈아입고 거실에 앉았다. 텔레비전을 켰다가 끄고, 창밖을 바라보다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았다. 아내가 집안일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둘 지적하기 시작했다. 며칠 후 아내가 참다못해 말했다.
“당신은 직장에서 퇴직했는데, 왜 나는 당신 비서로 취직해야 하나요?”
웃고 넘길 수도 있는 이야기지만, 퇴직 가정에서 흔히 일어나는 갈등을 함축한 장면이다. 남편은 직장에서 퇴직했을 뿐인데, 아내는 오랫동안 유지해 온 자기 생활의 질서까지 흔들리게 되었다. 남편은 직장에서 사용하던 지시와 관리의 방식을 가정으로 옮겨 왔고, 아내는 남편의 퇴직과 함께 뜻하지 않은 ‘재취업’을 하게 된 셈이다.
그러나 남편의 마음도 편하지 않았다. 그는 단순히 월급과 일자리를 잃은 것이 아니었다. 아침에 일어나 출근할 장소, 정기적으로 만나는 사람들, 자신을 필요로 하는 조직, 하루의 시간표와 자신이 누구인지를 설명해 주던 역할까지 함께 잃었다. 직장에서는 그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지만, 이제는 갈 곳이 없었다. 가족을 위해 평생 일했는데, 정작 집으로 돌아온 자신이 가족에게 불편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이 사례는 특정한 한 사람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상담 현장에서 만날 수 있는 퇴직자들의 경험을 상징하는 셈이다. 총장이나 교수, 목회자와 같은 존경받는 직책을 지낸 사람만 정체성의 상실을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공장에서 기계를 다룬 사람, 버스를 운전한 사람, 은행에서 일한 사람, 작은 가게를 운영한 사람도 일을 내려놓는 순간 똑같은 질문 앞에 선다.

“이제 나는 누구인가?”
위기개입론(crisis intervention)으로 보면 갑작스러운 퇴직과 예정된 정년퇴임은 서로 다른 성격을 지닌다. 해고, 구조조정, 질병, 사고, 사업 실패로 직장을 갑자기 잃는 것은 ‘우발적 위기(accidental crisis)’에 가깝다. 자신의 계획과 관계없이 갑자기 일어난 사건이 기존의 대처능력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에게는 먼저 충격을 완화하고 현실생활을 안정시키는 개입이 필요하다. 우울과 자살 위험, 재정과 주거 문제를 점검하고, 해고를 인간적 실패와 동일시하지 않도록 도우며, 작은 선택부터 시작하여 무너진 통제감을 회복하게 해야 한다.
그러나 정년퇴임은 다르다. 정년 날짜는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다. 본인도 알고, 가족도 알고, 직장도 알고 있다. 준비할 시간이 충분히 주어진 것처럼 보인다. 은퇴자금을 마련하고 건강검진을 받으며 여행과 취미생활을 계획하기도 한다. 그런데 막상 퇴임일이 오면 예상하지 못했던 혼미를 겪는 사람이 적지 않다. 퇴임식은 준비했지만 그 뒤의 자신은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년퇴임은 결혼, 출산, 자녀의 독립처럼 정상적인 생애주기에서 일어나는 ‘발달적 위기(developmental crisis)’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측 가능한 사건이라고 해서 반드시 편안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오랫동안 다가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은 “그동안 충분히 준비했을 텐데 왜 저러느냐”라고 생각하기 쉽다. 날짜를 알고 있다는 것과 마음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정년퇴임자는 경제적 수입의 변화만 겪는 것이 아니다. 직업적 정체성, 사회적 지위, 인간관계, 시간 사용, 부부관계와 가정 내 역할이 함께 변화한다. 평생 “김 부장님”, “박 선생님”, “사장님”, “교수님”, “목사님”으로 불리던 사람이 어느 날부터 아무런 직함 없이 자기 이름만으로 살아가야 한다. 따라서 정년퇴임은 단순한 휴식의 시작이 아니라, 이전의 자아와 작별하고 새로운 자아를 형성해야 하는 생애 전환이다.
물론 두 위기가 언제나 명확하게 나뉘는 것은 아니다. 정년은 예정되어 있었지만 본인은 더 일하기를 원했고 조직이 냉정하게 자리를 비우게 했다면, 발달적 위기에 상황적 위기가 겹칠 수 있다. 건강하고 능력도 남아 있는데 나이 때문에 물러났다고 느끼면 정년은 자연스러운 전환이 아니라 강제적인 추방처럼 경험된다. 그러므로 퇴직의 명칭만 보아서는 안 된다. 그 사람이 퇴임을 자발적 전환으로 경험했는지, 아니면 버림받고 밀려난 사건으로 경험했는지를 알아야 한다.
현대 사회에는 은퇴설계가 많다. 대부분 연금, 재산관리, 건강, 여행, 취미와 봉사활동을 다룬다. 모두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정년퇴임자에게 “취미를 가지십시오”, “운동하십시오”, “봉사활동을 하십시오”라고 권하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정체성을 잃은 사람에게 곧바로 새로운 일을 찾아 주는 것은, 상처를 살피지 않고 다시 Doing의 세계로 밀어 넣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그에게는 먼저 다음과 같은 질문이 필요하다.
- 나는 무엇을 잃었는가?
- 직함을 내려놓은 나는 누구인가?
- 배우자와 가족은 나의 퇴임으로 무엇을 경험하는가?
- 내가 행사하던 권한을 어떻게 다음 세대에 넘겨줄 것인가?
- 남은 생애를 무엇을 위해 살아갈 것인가?
이 질문들을 통합적으로 연구하고 돕는 분야를 ‘정년퇴임학’이라 한다. 퇴임 이후를 위한 취미교육이 아니라, 퇴임 전후의 애도와 정체성, 부부관계와 권한 이양, 영성과 새로운 소명을 다루는 학문이다. 정년은 미리 예고되어 있으므로 예방적 개입이 가능하다. 퇴임하기 몇 년 전부터 직장과 직함에 집중된 정체성을 조금씩 확장하고, 배우자와 퇴임 이후의 생활을 협의하며, 후배에게 권한을 이양하고, 새로운 관계와 소명을 준비하도록 도울 수 있다.
송별식 한 번으로 퇴임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몸은 직장을 떠났지만 마음은 여전히 옛 사무실을 배회할 수 있다. 그러므로 퇴임에는 직장을 떠나는 의식뿐 아니라, 이전 역할을 애도(Grief)하고 새로운 삶을 받아들이는 내적 통과의례가 필요하다. 퀴블러 로스(Kübler-Ross)의 '애도의 5단계'(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가 도움이 될 것이다.
· Doing에서 Being으로
대학 총장을 지낸 한 분이 정년퇴임 후 우울 증세로 상담을 받았다. 그는 교회 시니어 모임에 참여해 보았지만 사람들이 너무 수다스러워 적응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평생 조직을 이끌며 수많은 사람을 만났던 사람이었지만, 퇴임 후에는 피상적인 대화보다 조용히 자신을 돌아보고 삶의 의미를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원했다.
그는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의 사상을 빌려, 평생 Doing으로 살아왔으니 이제는 Being을 찾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명상’을 권했다. 명상은 단순한 휴식이나 이완기법이 아니라, 총장이라는 직함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서 한 인간으로 다시 서는 시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말을 그대로 낭만화해서는 안 된다. “모임이 너무 수다스럽다”는 말에는 깊은 대화를 원하는 갈망과 함께, 평범한 회원이 되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낯섦도 들어 있을 수 있다. 우울로 인해 사람과 자극을 견디기 어려워졌을 수도 있다.
명상이 관계를 피하는 명분이 되어서는 안 된다. 노년의 고독은 세상과 결별하기 위한 고립이 아니라, 깊어진 존재로 다시 사람들에게 돌아가기 위한 고독이어야 한다. 많은 사람이 모이는 모임이 맞지 않으면 두세 사람의 독서모임이나 영성모임, 후배와의 정기적인 만남을 선택할 수도 있다. 정년퇴임의 목표는 Doing을 모두 버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Being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건강한 전환은 다음과 같다.
Doing → Being → Meaningful Doing
평생의 성취와 역할을 잠시 내려놓고 존재의 가치를 회복한 뒤,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다시 기여하는 것이다. 성경은 Doing과 Being의 관계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 준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막 3:14)
예수께서 제자들을 세우신 목적에는 순서가 있었다. 먼저 “자기와 함께 있게” 하셨고, 그다음에 세상으로 보내어 일하게 하셨다. 제자들의 첫 번째 소명은 많은 일을 해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 함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순서를 뒤집어 살아왔다. 직장에서도, 교회에서도, 가정에서도 무엇을 해야만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일을 잘하면 인정받았고, 직위가 올라가면 자신의 존재도 높아진 것처럼 느꼈다. 교회에서조차 신앙의 깊이를 봉사와 직분과 활동의 양으로 증명하려 했다.
정년퇴임은 이 뒤집힌 순서를 바로잡을 기회다. 모든 직함을 내려놓고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에서 “나는 누구와 함께 있는 사람인가?”로 돌아가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더 많은 성과를 내라”고 먼저 요구하지 않았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요 15:4)
가지의 가치는 혼자 열매를 만들어 내는 능력에 있지 않다. 나무에 붙어 생명을 공급받는 데 있다. 그리스도인의 Being은 막연히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존재’다. 그러므로 성서적 전환은 단순히 Doing에서 Being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Doing → Being in Christ → Bearing Fruit. 즉 ‘일하는 존재’에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존재’로, 그리고 ‘끝까지 열매 맺는 존재’로 나아가는 것이다.
직장생활에서는 성과가 중요하다. 얼마나 생산했는지, 매출을 얼마나 올렸는지, 조직을 얼마나 성장시켰는지, 어떤 직위까지 올라갔는지를 평가받는다. 그러나 성경이 노년에게 묻는 것은 성과가 아니라 열매다. 성과는 내가 만들어 내지만, 열매는 생명과의 연결에서 맺힌다. 성과는 숫자로 비교되지만, 열매는 사람에게 나누어진다. 성과는 나의 이름을 높일 수 있지만, 열매는 다른 사람을 살린다. 무엇보다 성과에는 정년이 있지만 열매에는 정년이 없다.
“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니.”(시 92:14)
성경은 노인을 젊은 시절보다 생산성이 떨어진 사람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젊은 사람처럼 계속 바쁘게 일해야 가치 있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노년의 사명은 생산량을 유지하는 데 있지 않고, 오랜 세월을 통해 숙성된 열매를 나누는 데 있다.
젊은 날에는 앞장서 조직을 이끌었다면 노년에는 뒤에서 다음 세대를 축복할 수 있다. 전에는 많은 사람에게 명령했다면 이제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 깊이 들을 수 있다. 전에는 건물과 제도를 세웠다면 이제는 사람을 세울 수 있다. 전에는 자신이 직접 일을 완성했다면 이제는 후배가 완성하도록 기다려 줄 수 있다. 정년퇴임은 역할이 없어지는 사건이 아니라 역할의 성격이 달라지는 사건이다. 지휘에서 경청으로, 성취에서 성숙으로, 권한에서 지혜로, 성공에서 결실로 옮겨 가는 것이다. 퇴임했지만 소명은 끝나지 않았다. 전도하고 돌아온 제자들은 자신들이 이룬 놀라운 성과를 자랑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 10:20)
현대 정년퇴임자에게는 “네가 사장이었던 것, 교장이었던 것, 회사를 성장시킨 것, 교회에서 중요한 직분을 맡았던 것만으로 기뻐하지 말라. 네 이름이 하나님께 기억되고 있다는 사실을 기뻐하라.”라고 들릴 수 있다. 사람의 직함은 명함에서 지워질 수 있다. 사무실 문에 붙어 있던 이름표도 다른 사람의 것으로 바뀐다.
그러나 하나님께 기록된 이름은 퇴임하지 않는다. 직장에서는 더 이상 나를 부르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내 이름을 부르신다. 그래서 정년퇴임은 소명의 종료가 아니라 소명 수행 방식의 전환이다. 총장은 퇴임하지만 사람은 퇴임하지 않는다. 목회자는 담임목회에서 물러날 수 있지만 신앙과 사랑에서는 은퇴하지 않는다. 부모가 자녀를 책임지던 자리에서는 내려올 수 있지만, 축복하고 기도하는 부모의 소명은 계속된다.
정년퇴임은 인생의 무대에서 사라지는 날이 아니다. 성과로 자신을 증명하던 자리에서 내려와 하나님 안에서 존재의 가치를 다시 발견하는 날이다. 이제는 더 높이 올라갈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 안에 깊이 머물며, 오랜 세월 동안 얻은 지혜와 사랑을 다음 세대에 나누면 된다. 정년퇴임학이 궁극적으로 가르쳐야 할 것도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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