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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보기 →호주 판 ‘개들의 섬’: 얼어붙은 강의실, 그리고 시민권자의 부끄러움
학교 강의실 문을 열 때마다 폐부로 들이치는 공기는 시리도록 차갑다. 토론의 열기와 청춘의 싱그러운 숨결로 가득 차야 할 배움의 터전이, 어느 순간부터 마치 온기 하나 남지 않은 냉동 고처럼 적막하다. 창밖으로는 시드니의 찬란한 햇살이 부서져 내리지만, 책상 앞에 앉아 있는 학생들의 표정은 이미 영혼이 질식해 버린 시신처럼 창백하고 굳어 있다.
끝나도 그들 은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한다. 주저하며 교탁 앞으로 다가오는 청년들의 떨리는 손에는 과제물 이 아닌, 이민성의 비자 거절 통지서와 살인적으로 폭등한 렌트비 청구서가 들려 있다. "교수 님, 저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요?" 수년간 학업과 고된 노동을 병행하며 모범적으로 살아온 한 제자가 붉어진 눈으로 던진 이 질문 앞에서, 나는 한마디 말도 건네지 못한 채 얼어붙고 말았다.

나는 이 나라의 시민권자다. 안정된 신분을 보장받고, 투표용지를 쥐고 있으며, 국가의 변덕스러운 행정 폭력으로부터 안전한 울타리 안에 서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내 안에서 는 매일 참담한 무기력과 뼈아픈 부채감이 소용돌이친다. 눈앞에서 사랑하는 제자들의 삶과 청춘이 제도라는 도살장 위에서 난도질당하고 있는데, 그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이 비겁한 안도감과 무력감. 그것이 오늘날 호주 대학의 강단에 서 있는 지식인이 마주하는 처절한 형벌이다.
이 비정한 강의실 풍경을 볼 때마다 웨스 앤더슨 감독의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 《개들의 섬》 (Isle of Dogs)이 겹쳐 보인다. 영화 속 메가사키 시의 코바야시 시장은 전염병 위기를 핑계 삼아 수천 년간 인간과 호흡해 온 개들을 ‘쓰레기 섬’으로 추방한다. 치료제가 개발되었음에도 이를 철저히 은폐한 채 대중의 공포와 혐오를 부추겨 정권을 연장한다. 살아 숨 쉬는 생명 대 신 완벽히 통제 가능하고 고분고분한 ‘로봇 개’를 세우려 했던 관료적 오만은, 오늘날 호주 정 치권이 유학생과 단기 비자 소지자들을 다루는 방식과 소름 끼칠 정도로 닮아 있다.
지금 호주 사회를 짓누르는 주택 공급난과 공공 인프라의 과부하, 생활비 위기의 본질은 수십 년간 누적된 정치권의 도시 계획 실패와 공급 정책의 부재에 있다. 그러나 선거를 앞둔 정치 인들은 자신들의 구조적 무능을 성찰하는 대신, 가장 손쉽고 저항력 없는 대상을 ‘희생양’으로 골라냈다. 바로 투표권이 없는 유학생과 워킹 홀리데이 청년들이다. 유학생 비자 총량 제한 (Cap), 천정부지로 치솟은 비자 수수료, 모호하고 징벌적인 심사 기준이라는 서슬 퍼런 칼날 이 휘둘러지고 있다. 미디어와 정치권은 마치 이들만 국경 밖으로 몰아내면 전국의 주택난이 일거에 해결될 것처럼 여론을 호도한다.
이에 대해 호주 학계의 비판은 매섭고 통렬하다. 빅토리아 대학교 미첼 연구소(Mitchell Institute)의 피터 헐리(Peter Hurley) 박사를 비롯한 주거·인구 통계학자들은 객관적 데이터 를 통해 "유학생이 호주 전체 민간 임대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불과 4~5% 안팎에 불과하 며, 주택 위기의 본질은 조세 혜택에 기댄 투기와 건축 공급 인프라 실패에 있다"고 일관되게 증명해 왔다. 나아가 디킨 대학교의 파즈 파르바티(Fazal Rizvi) 명예교수를 비롯한 교육사회
학자들은 호주 정부가 "유학생들을 대학 재정을 지탱하는 '현금 인출기(Cash Cows)'로 철저히 도구화하다가,, 정치적 위기가 닥치자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사회적 '속죄양(Scapegoat)'으로 내던지는 비 인간화의 극치를 보이고 있다고 규탄한다. 연구자들은 선거철마다 손바닥 뒤집듯 법을 바꿔 청년들의 생애 기획을 무너뜨리는 정책을 두고 '문명국가의 외피를 쓴 행정적 폭력 (Administrative Violence)'이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역사는 단 한 번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문명이 화려한 번영의 정점에 서 있을 때, 내부의 부패와 구조적 실패를 스스로 돌아보는 대신 가장 취약한 이방인에게 그 죄를 덮어씌워 쫓아냈던 제국들은 예외 없이 비참한 자멸의 길을 걸었다.
서기 376년의 비극이 바로 그러했다. 훈족의 칼날을 피해 도나우강을 건너온 고트족 청년들은 로마를 침략하러 온 약탈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거친 황무지를 일구고 위태로운 국경을 지키 며 로마 사회의 밑바닥을 떠받치고자 했던 성실한 일손이자 병력이었다. 그러나 로마의 탐욕 스러운 관료 루피키누스와 위정자들은 생사의 기로에 선 이 절박한 청년들을 끝내 존엄한 인 간으로 대우하지 않았다.
식량을 걸어 잠근 채 개고기 한 마리의 값으로 어린아이를 노예로 넘기라 요구할 만큼 잔인하게 착취했고, 제국의 내부 모순으로 사회 불안이 곪아 터지자 모든 위기의 주범으로 이들을 낙인 찍어 배척했다. 필요할 때는 단물을 다 빼먹고, 쓸모가 다하자 쓰레기 섬처럼 버려진 이들에게 남은 것은 피눈물 나는 분노 뿐이었다.
신뢰와 인본을 짓밟힌 청년들이 끝내 무기를 들었을 때, 하드리아노 폴리스 평원에서 불타 사라진 것은 로마 정예군 과 황제 발렌스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약자를 도구로 삼다 스스로 파멸을 불러들인 로마 관료 주의의 종말이었다. 제국을 무너뜨린 진짜 힘은 외부의 칼날이 아니라, 자신들이 짓밟고 배신 했던 이주민들의 가슴속에 깊이 새겨진 한(恨)과 절망이었다. 지금 호주 정부가 휘두르는 칼날 역시 이 유서 깊은 패착과 무엇이 다른 가? 이 얼마나 비열하고 방자한 ‘감탄고토(甘呑苦吐)’인 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말 그대로다.
호주의 고등교육산업은 유학생들이 지불하는 막대한 등록금에 기대어 세계적 수준의 연구 역 량과 재정을 구축해 왔다. 농축산업의 수확기 일손, 새벽 물류와 청소, 도심의 식당과 돌봄 현 장 등 내국인이 기피하는 사회의 필수 영역은 이 젊은이들의 땀방울 없이는 단 하루도 온전히 굴러가지 못한다. 이들은 메디케어나 복지 수당 같은 사회 안전망의 혜택을 요구하지도 않은 채, 전액 사비로 보험을 들고 성실하게 세금을 납부해 왔다.
호주 범죄학 연구소(AIC)의 데이터가 증명하듯, 단기 비자 소지자들의 범죄율은 본토 출생 시 민보다 현저히 낮다. 비자 취소라는 엄중한 법적 억제력 속에서 누구보다 모범적으로 법을 준 수하며 살아간다. 이들은 사회를 위협하는 ‘문제아’가 아니라, 호주 경제를 떠받치는 가장 충 직한 동반자였다.
그럼에도 경제가 호황일 때는 ‘글로벌 인재’이자 ‘미래의 가교’라 치켜세우며 환영하더니, 정작 자신들의 정책 실패로 위기가 닥치자 하루아침에 ‘집값을 올리는 불필요한 과잉 인구’ 취급을 하며 제도적 쓰레기 섬으로 내몰고 있다. 투표권이 없어 항의조차 할 수 없 는 이들의 침묵을 악용해 정책 실패의 십자가를 지우는 것은, 명백한 민주주의의 타락이자 도 덕 불감증이다.
인간을 감정과 존엄을 지닌 생명이 아니라, 필요할 땐 쓰고 쓸모를 다하면 폐기 처분하는 소모품으로 대하는 사회는 결코 번영할 수 없다. 코바야시 시장이 감정 없는 로봇 개로 도시를 통제하려 했듯, 이 땅에 희망을 품고 온 청년들을 단순한 ‘순이민자 수치’나 ‘통계의 변수’로만 취급하는 관료주의는 결국 호주 사회 전체의 영혼을 메마르게 할 뿐이다. 영화 《개들의 섬》의 결말은 이 디스토피아의 끝을 똑똑히 보여준다.
거짓 공포와 관료적 계산으로 쌓아 올린 메가 사키 시의 체제는 영원할 것 같았지만, 진실을 밝혀낸 소수자들의 연대와 쓰레기 섬까지 날아 가 벗을 찾아낸 한 소년의 순수한 진심 앞에서 마침내 허물어졌다. 자신의 과오를 인정한 시 장의 참회와 함께 부패한 관료들은 법의 심판대에 올랐고, 버려졌던 개들은 다시 존엄한 가족 이자 이웃으로 제자리를 찾았다.
성경 역시 권력을 쥐고 법을 무기 삼아 약자를 억압하는 무법한 자들의 끝이 결코 형통할 수 없음을 엄히 경고한다.
"불의한 법령을 만들며 불의한 말을 기록하며 빈핍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여 가난한 내 백 성의 권리를 박탈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이사야 10장 1~2절)
선거철 표심과 정치적 면피를 위해 투표권 없는 유학생과 청년 이주민들을 주택난과 인플레이 션의 ‘속죄양’으로 내모는 행태는, 아무리 정교한 행정 용어로 포장해도 성경이 엄히 질타하는 ‘불의한 법령’이자 구조적 죄악에 불과하다.
그러나 경고의 끝은 파멸이 아닌 참된 정의의 회복을 향해야 한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하수)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아모스 5장 24절)
이 말씀은 지금 호주 사회와 정책 입안자들에게 던지는 가장 준엄한 시대적 요청이다. 공의가 하수같이 흐른다는 것은, 힘 있는 기득권의 표 계산에 휘둘리는 정치가 아니라 나그네와 약자, 즉 사회에서 가장 발언권이 없는 이들의 억울함을 씻어내는 정치가 살아 숨 쉼을 뜻한다.
호주가 진정으로 세계인이 선망하는 ‘더 살기 좋은 나라’가 되는 길은 국경의 벽을 높이고 청 년들의 꿈을 꺾는 비정함에 있지 않다. 배움과 미래를 품고 바다를 건너와 이 땅의 새벽을 깨우며 땀 흘려 온 이주 청년들을 동등한 인간이자 동반자로 품어 안는 따뜻하고 예측 가능한 정책에서 시작된다.
나의 얼어붙은 강의실에 다시 온기가 돌기를 소망한다. 영화 속 쓰레기 섬이 마침내 치유와 화해의 장소로 거듭났듯, 호주 대륙 전역에 비열한 배제의 칼날 대신 공의와 상식, 그리고 인 간 존엄성이 마르지 않는 강물처럼 도도히 흐르기를, 한 사람의 부끄러운 시민권자로서 간절 히 기도한다.
글쓴이: 박만경목사(시드니 우림 교회 담임, Iona Trinity College 상담학 교수, 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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