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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보기 →김종환 박사 시니어 칼럼 8 사중복음과 신유
한 사람의 갑작스러운 질병은 가족의 일상이 흔들리고, 멀리 있는 친척과 친구의 마음도 무거워지며, 교회와 단체의 대화방에는 회복을 간구하는 기도가 이어진다.
“수술이 잘되게 하소서.”
“암세포가 깨끗이 제거되게 하소서.”
“의료진의 손을 붙들어 주소서.”
한 사람의 아픔을 공동체 전체의 아픔으로 품는 기도는 귀하다. 그러나 병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면서도 우리는 때때로 당황한다. 하나님은 지금도 병을 고치시는가? 믿음으로 기도하면 반드시 완치되는가? 낫지 않는다면 환자나 가족의 믿음이 부족한 것인가? 의학적 치료와 신유기도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복음은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여 죽은 뒤 천국에 가게 한다는 소식에만 머물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죄인인 인간뿐 아니라 병들고 불안하며 관계가 깨어지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 전체를 향한다. 복음은 아픈 몸에도 찾아온다.
캐나다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목회한 A. B. 심프슨(A. B. Simpson, 1843~1919) 목사는 복음을 네 가지로 요약했다.
· Christ our Savior,
· Christ our Sanctifier,
· Christ our Healer,
· Christ our Coming King.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주이시며, 성결하게 하시는 분이시며, 치료자이시며, 다시 오실 왕이시라는 고백이다. 이를 ‘사중복음(The Fourfold Gospel)’이라고 부른다. 사중복음은 복음의 축복이 정확히 네 가지뿐이라는 뜻이 아니다. 심프슨의 저술에서도 이 네 가지가 복음의 모든 내용을 제한하는 목록이 아님을 밝힌다. 이것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중생·성결·신유·재림이라는 네 방향에서 바라보는 그리스도 중심적인 요약이다.
사중복음에서 중요한 것은 네 가지 축복보다 네 문장에 반복되는 주어다. 모든 문장의 주어는 그리스도다. 그리스도는 단순히 구원이라는 선물을 전달하는 분이 아니라 그 자신이 우리의 구주이시다. 성결이라는 높은 상태에 도달하는 방법만 가르치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성결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치료라는 기적을 나누어 주는 능력자가 아니라 그 자신이 우리의 치료자이시다. 미래의 시간표에 등장할 한 인물이 아니라 다시 오셔서 만물을 새롭게 하실 왕이시다.
그러므로 사중복음은 “나는 어떤 축복을 받았는가?”보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나에게 누구인가?”를 묻는다. 신유 역시 그 중심은 기적적인 현상이 아니다. 치유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심프슨은 많은 목회적 책임과 과로 속에서 심각한 건강의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자신의 몸이 사역의 요구를 감당하기 어렵다고 느꼈고, 질병 가운데서 치료자이신 그리스도를 새롭게 의지하게 되었다. 그가 고백한 신유 체험은 이후 사중복음 형성에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그는 개인적으로 신유(divine healing)를 체험한 후 중생·성결·신유·재림의 사중복음을 선포했다. 그러나 심프슨에게 신유는 기적을 얻기 위한 종교적 기술이 아니었다. 그의 저서 《치유의 복음(The Gospel of Healing)》은 신유를 성경과 믿음의 문제로 다루며, 치유의 주체를 인간의 강한 의지나 특별한 은사를 가진 사역자가 아니라 하나님께 두고 있다.
그가 강조한 것은 ‘치유를 받았다’는 체험 자체보다 병약한 인간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생명이었다. 신유는 그리스도를 이용하여 건강을 얻는 방법이 아니라, 건강과 질병의 모든 상황에서 그리스도께 자신을 맡기는 신뢰였다. 이 점을 놓치면 신유는 복음에서 분리되어 하나의 종교상품이 된다. 신유 체험자가 주목을 받고, 극적인 간증이 복음보다 앞서며, 병이 낫지 않은 사람은 믿음 없는 사람으로 밀려나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러나 사중복음의 중심은 치유의 기적이 아니라 치유자이신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의 복음과 치유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며 병든 사람을 외면하지 않았다. 나병환자를 만졌고,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했으며, 중풍병자를 일으켰다. 오랫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의 손길을 받아 주었고,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찾아갔다. 예수님의 치유는 단순히 초자연적인 능력을 과시하기 위한 기적이 아니었다. 병으로 인해 공동체에서 배제된 사람을 다시 관계 안으로 불러들이고, 부정하다고 낙인찍힌 사람의 존엄을 회복하며, 하나님 나라가 이미 인간의 몸과 삶 가운데 다가왔음을 보여 주는 표징이었다.
성경의 구원은 영혼만 몸에서 꺼내어 하늘로 보내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몸과 마음, 관계와 영혼을 지닌 ‘전인적 존재(Holistic being)’로 창조하셨다. 죄와 죽음으로 깨어진 피조세계를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구원도 인간의 전 존재를 향하신다.
야고보서는 병든 이를 개인의 고통 속에 방치하지 않고 공동체의 기도 가운데 세운다(약 5:14). 따라서 교회가 병든 사람의 치료를 위해 구체적으로 기도하는 것은 당연하다. 수술이 잘되고, 암세포가 제거되며, 감염이나 부작용 없이 건강이 회복되기를 담대히 간구할 수 있다. 하나님이 실제로 질병을 치료하실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성서적 신앙이다.
그러나 신유기도를 일정한 조건을 갖추면 원하는 결과가 나오는 공식으로 바꾸어서는 안 된다. 큰 목소리, 많은 사람의 기도, 반복적인 선포가 하나님의 뜻을 움직이는 종교적 압력이 될 수는 없다. 기도는 인간이 하나님을 통제하는 수단이 아니라, 가장 깊은 소원을 정직하게 아뢰면서 결과를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에 맡기는 믿음의 실천이다.
신유를 강조하는 일부 신앙공동체에서는 병원 치료를 받거나 약을 복용하는 것을 믿음의 부족으로 간주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이분법은 성경적으로 안전하지 않다. 하나님은 기적적인 방식으로 역사할 수 있다. 동시에 의사의 지식과 수술, 약물과 방사선치료, 간호와 재활을 통해서도 치료하실 수 있다. 의료진이 정확히 진단하고, 수술하는 손이 흔들리지 않으며, 약물이 적절하게 작용하도록 기도하는 것도 신유를 위한 기도이다.
누가는 바울과 동행한 의사였고,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의 잦은 병을 위한 실제적인 처방을 권하기도 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위해 기도만 하지 않고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며, 자기 짐승에 태워 돌봄을 받을 수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의학은 인간의 생명을 완전히 지배할 수 없으며, 의사도 생명의 주인이 아니다. 그러나 그 한계가 의학의 가치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신앙은 의학도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일반은총으로 받아들인다. 기도와 의학은 서로 경쟁할 필요가 없다. 둘 모두 생명을 돌보는 일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신유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cure와 healing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Cure는 암세포가 제거되고 감염이 사라지며 손상된 신체 기능이 회복되는 의학적 완치를 가리킨다. Healing은 몸의 회복을 포함하여 마음과 관계, 삶의 의미와 영혼의 온전함까지 아우르는 더 넓은 개념이다. 환자는 완치되었지만 마음에는 깊은 두려움이 남을 수 있다. 반대로 질병은 계속되지만 가족과 화해하고, 삶의 의미를 발견하며, 하나님 안에서 평안을 얻을 수도 있다. 전자는 질병의 cure를 경험했지만 더 깊은 healing이 필요할 수 있고, 후자는 의학적인 cure에 이르지 못했어도 중요한 healing을 경험한 셈이다.
물론 이러한 구분을 질병의 완치를 쉽게 포기하기 위한 말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먼저 구체적인 치료와 회복을 간구해야 한다. 예수께 나아온 나병환자는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말했다. 예수는 그에게 손을 대시며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셨다(막 1:40-41). 그러나 모든 기도가 우리가 원하는 시간과 방법대로 응답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자신의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세 번 간구했다. 하나님은 그 가시를 즉시 없애는 대신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대답하셨다(고후 12:9).
이 말씀을 병든 사람에게 너무 빨리 적용해서도 안 된다. 환자가 고통을 충분히 호소하기도 전에 “하나님의 뜻이 있으니 감사하라”고 말하면 신앙의 언어로 고통을 억압하는 결과가 된다. 바울도 먼저 세 번 간절히 구했다. 제거해 달라는 정직한 기도 뒤에, 제거되지 않은 현실에서도 자신을 붙드는 은혜를 발견했다. 그러므로 성서적 신유에는 세 가지 기도-질병을 고쳐 달라는 기도, 치료의 시간을 견디게 해 달라는 기도, 어떤 상황에서도 그리스도를 놓치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가 함께 들어 있는 셈이다. 신유는 하나님의 은혜이지 인간의 신앙성적표는 아니다.
이사야는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By his wounds we have been healed)”라고 선포했고(사 53:5), 베드로는 이 말씀을 십자가의 그리스도께 적용하여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고백했다(벧전 2:24). 마태도 이 말씀을 적용하여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라고 했다(마 8:17).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히 ‘신유(Divine Healing)’를 간구한다. 그리고 마지막 부활에서 질병과 고통과 죽음이 사라지는 온전한 치유를 기다린다.
-서울신학대학교 명예교수 김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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