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DAY'S WORD

이사야 41: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시드니 22°C ☀️
Admin

뉴스

더보기 →
오피니언/기고

김종환 박사 시니어 칼럼 ⑦ 노년의 영적 수태

OCJ 2026. 10. 20. 03:57

노년학(gerontology)에 “백발노인의 귀는 영적 모태가 된다.(The ear of a white-haired elder becomes a spiritual matrix)”는 말이 있다. 젊은이의 말이 노인의 귀로 들어가면, 노인은 그것을 곧바로 평가하거나 반박하지 않고 자기 안에 품는다. 젊은이의 말은 노인의 오랜 경험과 지혜 속에서 숙성되어, 때가 되면 그 말은 노인의 입을 통하여 다시 생명의 지혜로 태어난다는 뜻이다.

 

여기서 귀는 단순히 소리를 듣는 신체기관이 아니며, 한 사람의 아픔과 질문, 아직 말이 되지 못한 혼란까지 받아들이는 영적 공간이다. 여성의 모태가 생명을 받아들여 보호하고 성장시키듯, 노인의 귀는 젊은이의 미숙한 생각과 불안한 꿈을 받아들여 그것이 의미 있는 생명으로 자라도록 품어 주는 곳이다.

 

 

그래서 ‘듣는다’는 것은 상대방의 말을 내 생각으로 삼키는 일이 아니라, 그 사람의 생명이 자기 모습대로 자랄 수 있도록 내 안에 공간을 내주는 일이다. 자녀와 손주들은 언제나 노인의 정답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며, 때로는 자신의 이야기를 판단하지 않고 들어 줄 사람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우리는 자녀나 손주가 말을 시작하기도 전에 대답을 할 때가 많다.

 

“내가 살아 보니 그건 안 된다.”

“너희는 아직 세상을 몰라.”

“내 말대로 하면 실패하지 않는다.”

 

이 말들에는 사랑과 염려가 들어 있지만, 사랑에서 나온 말이라도 너무 빨리 주어지면 젊은이의 마음속에 들어가지 못한다. 씨앗도 흙 속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있어야 싹을 틔우는 것처럼, 사람의 말도 누군가의 마음속에 안전하게 받아들여져야 비로소 생명이 될 수 있다. 젊은이를 가르치려는 노인은 많지만, 젊은이의 말을 자기 안에 품어 주는 어르신은 드문 것 같다. ‘노년의 귀가 영적 모태가 된다.’는 의미는 말하기 전에 먼저 듣고, 판단하기 전에 먼저 품으며, 충고하기 전에 먼저 이해하는 것이다.

 

미하엘 엔데의 철학적 판타지 소설 《모모》의 주인공은 폐허가 된 원형극장에 사는 작은 소녀이다. 모모에게는 학식이나 재산, 특별한 언변이 없다. 다만 누구에게도 없는 한 가지 재능이 있는데, 바로 사람의 말을 온 마음으로 들어 주는 능력이다. 사람들은 문제가 생기면 이렇게 말하였다.

 

“모모에게 가 보게.”

 

모모는 해결책을 가르쳐 주거나 충고하지 않는다. 그저 조용히 앉아 상대의 말을 온 마음으로 들었다. 그런데 모모 앞에서 이야기하다 보면 우유부단한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깨닫고, 수줍은 사람은 용기를 얻으며, 다투던 사람들은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고 화해하게 된다. 모모가 답을 준 것이 아니라, 그의 경청 안에서 사람들이 자기 안에 있던 답을 발견한 셈이다. 특히 두 친구가 심하게 다투다가 모모를 찾아오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모모는 어느 편이 옳은지 판결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충분히 말하도록 들어주었다. 모모의 고요한 경청 안에서 그들은 상대의 처지를 보기 시작하고, 마침내 자신들이 왜 싸웠는지조차 우습게 느끼며 화해했다. 이것이 바로 ‘백발노인의 귀는 영적 모태가 된다.’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성경은 노년을 단지 인생을 마감하는 시기로만 보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젊은이보다 노인에게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맡기셨다. 노년에도 사람은 다시 태어날 수 있으며, 자기 안에서 새로운 믿음과 사랑을 잉태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자신의 경험과 지혜, 경청과 기도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게 할 수도 있다. 이것이 ‘노년의 영적 수태’이다.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는 천사로부터 늙은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그는 그 약속을 쉽게 믿지 못하여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라고 말했다 (눅 1:8).

 

사가랴는 하나님의 약속보다 자신의 나이를 먼저 바라보았다. 그에게 노년은 더 이상 새로운 일이 일어날 수 없는 때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묻기보다, 자신이 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그래서 사가랴는 요한이 태어날 때까지 말을 하지 못하게 된다. 그의 침묵을 단지 불신에 대한 형벌로만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사가랴에게 침묵은 자기 경험의 한계를 넘어 하나님의 새로운 일을 받아들이는 영적 수련의 시간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는 말을 잃은 동안 들을 수밖에 없었다. 기다렸을 것이다. 늙은 자신과 아내를 통하여 이루어질 하나님의 일을 마음속에 품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들이 태어나자 그의 입이 열렸다. 오랜 침묵 뒤에 나온 그의 첫말은 불평도 변명도 아니었으며, 하나님을 찬송하고, 새로 태어난 아이의 미래를 축복하는 예언이었다.

 

젊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힘이었다면, 노년에는 깊이 듣고 오래 품은 뒤 꼭 필요한 한마디를 건네는 것이 힘일 수 있다. 사가랴의 닫힌 입은 그의 내면에서 새로운 말씀이 자라나는 모태가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노년에는 말이 줄어드는 것보다 말의 무게가 깊어지는 것이 중요하다. 이전에는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말했다면, 이제는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말해야 한다. 젊은 시절에는 나의 경험을 설명하기 위해 말했다면, 이제는 다음 세대의 미래를 축복하기 위해 말해야 한다. 그러므로 노년의 생식력은 생물학적 수준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과 지혜를 통하여 젊은이들 안에 새생명을 잉태하고 탄생시키는 ‘영적 수태’라고 한다.

 

《모모》가 경청을 문학적으로 보여 준다면, 본회퍼는 《신도의 공동생활》에서 경청을 그리스도인의 첫 번째 섬김으로 규정한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서 시작되듯, 형제를 사랑하는 일도 그의 말을 듣는 데서 시작된다고 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만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말을 들어 주시는 귀도 빌려주신다. 이는 매우 깊은 통찰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 주는 것은 단순한 친절이 아니라, 하나님의 귀를 빌려 주는 사역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우리는 종종 듣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반드시 무엇인가 말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도 제대로 듣기 어려워진다. 자신이 말할 차례만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타인의 고통도,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도 들어갈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께서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약 1:19)고 하신 것이다.

 

본회퍼는 형제의 말을 듣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서로에게 행하는 첫 번째 섬김이라고 했다. 우리가 사랑으로 들어 줄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귀를 빌려 한 사람의 외로운 영혼을 품으시는 셈이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라고 하였다(갈 4:19). 아이를 낳아 본 적이 없는 남성 바울이 자신을 해산하는 어머니에 비유했다. 바울에게 복음 전도와 목회는 지식을 전달하는 일이 아니었다. 한 사람의 내면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질 때까지 사랑하고, 기다리고, 다시 아파하는 해산의 과정이었다. 그러므로 영적 수태와 출산은 여성에게만 해당하는 비유가 아니다. 한 사람의 영혼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자라도록 오래 사랑하고 기다리는 사람은 누구나 영적 어머니가 되고 영적 아버지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노인은 아직 많은 생명을 품고 있다. 낙심한 자녀를 다시 일으키는 한마디, 손주의 가능성을 믿어 주는 눈빛, 젊은 목회자의 시행착오를 기다려 주는 인내, 외로운 이웃의 말을 들어 주는 귀, 이름도 알지 못하는 다음 세대를 위한 기도 속에서 새로운 생명이 자라고 있다.

 

평생 교회에서 봉사하던 노인이 몸이 약해져 이전처럼 일하지 못하게 되었더라도 그의 영적 생식력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새벽마다 자녀와 손주, 교회와 다음 세대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생명을 잉태한다. 외로운 사람의 전화를 받아 주고, 젊은이가 자기 이야기를 끝까지 말하도록 기다려 주는 일도 영적 출산의 과정이다. 신체의 힘은 줄어들 수 있지만, 한 사람을 품을 수 있는 영혼의 넓이는 오히려 더 커질 수 있다.

 

수태는 생명을 받아들이고 품는 일이다. 그러나 출산은 품고 있던 생명을 밖으로 내보내는 일이다. 영원히 붙잡고만 있다면 출산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노년의 영적 수태에는 반드시 ‘놓아줌’이 따라야 한다.

 

노년학에서 사람이 자기 직위에서 적절한 때에 평화롭게 물러나는 문제도 중요하게 다룬다. 이것은 단순히 힘을 잃거나 쫓겨나는 일이 아니다. 다음 사람이 자랄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 주는 적극적인 생명 행위가 될 수 있다.

 

교회와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평생 책임을 맡아 온 사람이 때가 되었는데도 모든 결정을 계속 움켜쥐고 있으면 다음 세대는 성장하기 어렵다. 후배에게 일을 맡긴 뒤에도 자신의 방식대로 하지 않는다고 끊임없이 간섭하면, 자리는 넘겨주었지만 권한은 넘겨주지 않은 셈이다. 참된 영적 출산은 “내가 아니어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데서 완성된다.

 

자녀가 부모와 다른 길을 선택하고, 손주가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시대의 언어로 살아가며, 후배가 우리가 사용하지 않았던 방법으로 일하더라도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새로운 생명은 부모에게서 태어나지만 부모의 소유물은 아니다. 다음 세대 역시 우리의 경험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우리의 복사판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노인이 물러난다는 것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앞자리에서 내려와 뒷자리에서 축복하는 것이다. 명령하는 사람에서 지켜보는 사람으로, 일을 직접 이루는 사람에서 다른 사람이 이루도록 격려하는 사람으로 역할이 바뀌는 것이다. 어쩌면 노년의 가장 어려운 영성은 무엇인가를 더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품어 온 사람이 자기 길을 걸어가도록 놓아주는 일인지도 모른다.

 

-서울신학대학교 명예교수 김종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