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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보기 →김병근 칼럼 / 잎이 없는 바나나
얼마 전, 이웃집 정원에 열린 초록빛 알알이 맺힌 바나나 송이를 보며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 탐스럽게 익어가는 바나나가 매달린 줄기에는 놀랍게도 푸른 잎이 단 한 장도 남아있지 않았다. 잎이 다 떨어져 나간 앙상한 줄기에서 어떻게 저토록 생명력 넘치는 열매를 맺고 있는 것일까. 그 경이로운 모습은 예기치 못한 상실과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우리 삶에 깊은 치유의 실마리를 던져준다.

첫째는 상실 이면에 존재하는 '내면의 회복탄력성(Resilience)'에 대한 신뢰다. 바나나는 화려한 잎이 무성할 때 빛을 모아 땅속 깊은 뿌리줄기에 에너지를 차곡차곡 저장해 둔다. 그리하여 비바람에 잎이 꺾이고 시들어 버려도, 비축해 둔 힘으로 끝까지 생명을 잉태해 낸다. 극심한 트라우마는 우리의 일상을 지탱하던 '푸른 잎'을 앗아가고 다 끝난 것 같은 고갈 상태를 만들지만, 치유는 내면 깊은 곳에 시련을 견뎌낼 본연의 힘이 여전히 존재함을 굳게 믿는 데서 출발한다.
둘째는 고립을 넘어선 '안전한 연결과 공동 조율(Co-regulation)'의 치유력이다. 잎이 없는 줄기가 홀로 고군분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땅속을 들여다보면 결코 혼자가 아니다. 옆에서 푸른 잎을 자랑하는 다른 줄기들과 하나의 거대한 뿌리로 단단히 연결되어 있다. 스스로 에너지를 낼 수 없을 때, 이웃한 줄기들이 광합성으로 얻은 자양분을 기꺼이 나누어 주기에 열매가 익어갈 수 있다. 극심한 상처는 사람을 깊은 고립감에 빠뜨리지만, 온전한 치유는 타인과의 안전한 연결망 속에서 일어난다. 정서적 지지를 끊임없이 공급해 주는 공동체야말로 쓰러진 이를 일으켜 세우는 '푸른 잎을 가진 이웃 줄기'다.
셋째는 상처의 흔적을 품고 이루어내는 '외상 후 성장(Post-Traumatic Growth)'이다. 잎을 잃은 줄기는 상실 이전처럼 무성한 잎을 다시 되찾지는 못했지만, 결국 통통하고 귀한 바나나 열매를 맺어냈다. 트라우마의 치유 역시 완벽한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비록 상처의 흔적을 안고 살아갈지라도 이웃과의 연대와 내면의 숨겨진 힘을 바탕으로 삶의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창조해 내는 과정이다.
이러한 바나나의 섭리는 성경 속 룻기에 등장하는 나오미의 삶에서도 고스란히 발견된다.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잎이 모두 떨어져 나간 앙상한 줄기 같았던 나오미는, 곁에서 끝까지 뿌리를 연결해 준 며느리 룻과 보아스라는 '푸른 잎을 가진 이웃 줄기' 덕분에 다시 치유의 에너지를 공급받았다. 그 안전한 연대망 속에서 나오미는 마침내 상실을 딛고 위대한 생명의 열매(오벳)를 품에 안을 수 있었다.
약육강식의 척박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잎이 없는 바나나는 묵직한 화두를 던진다. 치유의 여정은 상실감에 빠진 이들로 하여금 자신의 깊은 뿌리에 아직 생명력이 남아있음을 곁에서 보게 하고, 자신을 향해 영양분을 흘려보내는 안전한 지지망이 있음을 알게 하며, 그 연결망 속에서 다시 삶의 열매를 맺는 발걸음을 하게 하고, 마침내 상처를 넘어선 연대와 성장의 삶을 계속하게 하는 것이다. 잎이 없는 바나나가 건네는 이 무언의 설교가 우리 모두를 살리는 따뜻한 치유의 메시지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글쓴이: 김병근(엠마오 상담대학 학장, 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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