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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보기 →김종환 박사 시니어 칼럼 ⑥ 어모털리티(Amortality)
지난 칼럼 제목 ‘호모 헌드레드(Homo Hundred)’와 함께 ‘어모털리티(Amortality)’는 현대 시니어를 상징한다. 이제는 나이와 상관없이 30·40대들처럼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즐기며 사는 어르신이 많은데, 이를 뜻하는 단어이다. 예전에는 '몇 살이면 결혼해야 하고, 몇 살이면 할아버지·할머니 노릇 해야 한다'는 정해진 틀(나이 서열)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40대에 첫 아이를 낳기도 하고, 70대에 모델이나 유튜버로 데뷔하기도 한다. 나이는 달라도, 살아가는 모습은 다 같은 청춘인 시대가 된 셈이다. '내 나이가 어때서~∼’ 노래 가사처럼 나이라는 숫자의 벽을 허물고, 평생을 현역 청춘으로 살아가는 멋진 라이프스타일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으시다.
어모털리티는 타임(TIME)지 저널리스트 캐서린 메이어(Catherine Mayer)가 만든 신조어로서, '영원히 살 수 없는' 모털(mortal)에 부정 접두사 'a-'를 붙인 ‘나이 없이 살아가기’를 뜻하며, 어모털족(Amortals)은 나이에 맞는 옷차림과 행동 양식을 거부하고, 10대 후반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비슷한 라이프스타일을 유지하며 왕성하게 활동하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이는 죽지 않는다는 ‘이모털리티(immortality)’와는 다르다. 생물학적 죽음을 극복한다는 말이 아니라, “이 나이에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사회적 지표에서 벗어나 젊게 살아가는 삶을 의미한다. 나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이가 삶의 모든 가능성을 결정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호모 헌드레드가 ‘길어진 생애’를 말한다면, 어모털리티는 그 길어진 생애를 살아가는 ‘새로운 마음’이라고 하겠다. 여기에서 중요한 질문들이 나오게 된다.
나이를 잊고 사는 것이 곧 잘 사는 것일까?
늙음을 거부하며 젊은 사람처럼 사는 것이 어모털리티일까?
나이에서 자유로워지는 것과 죽음을 외면하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평균수명이 짧았던 시대에는 교육-직업-은퇴라는 생애의 단계가 분명했다. 그러나 호모 헌드레드 시대에는 60대에 은퇴하여 3,40년이나 되는 노년기를 휴식으로만 채우기에는 너무 길다. 어모털리티는 우리에게 ‘나이가 당신의 가능성을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겠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셈이다. 일흔에도 그림을 시작할 수 있고, 여든에도 외국어를 배울 수 있고, 새로운 친구를 사귀며, 여행을 떠날 수도 있다. 오랫동안 멀어진 자녀에게 먼저 전화를 할 수도 있으며, 평생 하지 못했던 사과를 친구에게 건네는 데에도 정년은 없다. 성경을 새롭게 공부하고, 자신의 신앙을 다시 성찰하는 데 늦은 나이는 없다.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자신의 생각은 언제나 옳다고 여기며 새로운 질문을 거부하는 것, 익숙한 사람만 만나고, 과거의 이야기만 되풀이하며, 젊은 세대에게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할 때, 이미 마음의 문은 닫힌 셈이다. 그래서 노년의 반대말은 청춘이 아닐지 모른다. 젊어도 마음이 닫히면 늙은이며, 나이가 많아도 배우고 성장하면 젊은이, 어모털족이다.
영화 《아델라인: 멈춰진 시간》(The Age of Adaline)은 나이 없이 산다는 것이 반드시 축복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주인공 아델라인은 사고를 당한 뒤 29 살에서 더 이상 늙지 않게 된다. 그는 1937년 겨울 눈 내리는 밤에 운전하다가 눈길에 미끄러져 차와 함께 호수로 추락한다. 차디찬 물속에서 저체온증으로 결국 심장이 멎고 사망한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호수에 강력한 벼락이 떨어진다. 이 낙뢰의 엄청난 전기 충격이 마치 심장제세동기처럼 작용하여 멎었던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든다. 이 낙뢰의 강력한 에너지와 차가운 물(저체온증)의 결합이 DNA 구조를 변화시켰고, 이로 인해 그는 시간이 흘러도 세포가 노화하지 않는 '멈춰진 시간'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사람들은 영원한 젊음을 꿈꾸지만, 실제로 젊음을 얻은 그의 삶은 행복하지 못하다. 세월이 흘러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늙어 가는데 자기만 홀로 젊은 모습에 머물고, 어린 딸은 어느새 자신보다 더 늙어 보이는 나이가 된다. 그는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을 피하려고 이름과 거처를 바꾸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누군가를 사랑해도 자신의 비밀을 밝힐 수 없고, 함께 미래를 약속할 수도 없다.
젊음을 잃지는 않았지만 어느 관계에도 깊이 뿌리내리지 못한다. 늙지 않는 몸은 얻었으나, 누군가와 함께 늙어 갈 수 있는 행복을 잃은 셈이다. 영화 후반에 그는 자신의 머리에 생긴 흰머리 한 가닥을 발견한다. 흰머리는 노화의 흔적이지만, 그는 그것을 보고 기뻐하게 된다. 다시 나이를 먹기 시작했다는 표지이자, 이제 사랑하는 사람과 같은 시간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어모탈리티가 정말 행복인가?’라고 묻는 셈이다.
어느 밤, 유대인의 지도자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왔다. 그는 사회적 지위와 학문, 신앙적 경륜을 지닌 사람이었다.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었고, 오랜 세월 존경받으며 살아왔다. 그런데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 뜻밖의 말씀을 하셨으며, 그는 당황하여 물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니고데모는 새로운 탄생을 육체의 시간으로만 이해한 셈이다. 늙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어머니의 태에 들어가 태어날 수 있느냐고 물은 것이다. 그의 질문 속에는 모든 노인이 한 번쯤 품는 탄식이 들어 있다.
“이미 늦지 않았는가?”
“지나간 삶을 어떻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가?”
“이 나이에 사람이 정말 달라질 수 있는 것인가?”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거듭남은 늙은 몸을 젊은 몸으로 되돌리는 일이 아니며, 성령으로 새로워지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나이를 지우라고 하지 않으셨다. 그 나이에도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존재임을 가르치셨다. 여기에 기독교적 어모털리티의 핵심이 있다고 생각한다. 기독교적 어모털리티는 젊음을 연장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움을 잃지 않는 것이다. 사람은 여든 살에도 생각을 바꿀 수 있다. 평생 미워했던 사람을 용서할 수 있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수 있다. 자녀를 가르치려는 자리에서 자녀의 말을 듣는 자리로 옮겨 갈 수도 있다. 오랫동안 형식적으로 지켜 온 신앙이 살아 있는 믿음으로 다시 태어날 수도 있다.
젊을 때의 변화는 앞날을 위한 준비라면, 노년의 변화는 지나온 삶 전체에 새로운 의미를 주는 것이다. 뒤늦은 사과 한마디가 수십 년 묵은 가족의 상처를 치유하고, 마지막에 건넨 축복 한마디가 자녀의 남은 생애를 붙들어 주기도 한다. 노년에도 거듭남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이가 많다는 것은 더 이상 변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오랜 세월 동안 굳어진 편견과 상처, 자존심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서 다시 시작해야 할 시간이 되었다는 뜻일 수 있다.
♧ 어모털리티의 빛과 그림자
어모털리티는 나이가 만든 감옥에서 사람을 해방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림자도 있다. 나이 없이 산다는 생각이 늙음과 죽음을 부정하는 태도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문화는 젊음을 지나치게 숭배한다. 흰머리와 주름을 감추고, 노화의 흔적을 실패처럼 여긴다. 건강을 관리하는 것은 소중하지만, 젊어 보이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되면 나이가 들수록 자기 몸과 싸우게 된다. 아무리 노력해도 시간의 흐름을 완전히 멈출 수는 없기 때문이다. 노인이 젊은 사람처럼 옷을 입고 새로운 문화를 즐기는 것은 자유이다. 그러나 젊어 보여야만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또 다른 속박이다.
또한 어모털리티에는 죽음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태도-이모털리티도 담겨 있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현대사회는 죽음을 병원과 요양시설의 보이지 않는 공간으로 밀어내었다. 사람들은 노후의 여행과 재정, 건강관리는 준비하면서도 죽음에 대해서는 말하기를 꺼린다. 마치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면 죽음이 오지 않을 것처럼... 그러나 죽음을 잊는다고 오늘을 더 충실히 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시간이 무한하다고 생각하면 사랑과 화해를 뒤로 미루게만 된다. 성경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모세는 이렇게 기도했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 90:12)
날을 계수한다는 것은 죽음을 두려워하며 사는 것이 아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알고 오늘을 낭비하지 않는 것이다. 언젠가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알기에 지금 사랑하고, 오늘 용서하며, 아직 말할 수 있을 때 고맙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숙한 어모털리티에는 두 가지가 함께 있어야 한다.
나이를 잊는 자유와 죽음을 기억하는 지혜이다.
나이를 잊는 자유는 “이제 너무 늦었다”는 절망에서 우리를 구한다. 죽음을 기억하는 지혜는 “아직 시간이 많다”는 착각에서 우리를 깨운다. 하나는 새로운 시작을 가능하게 하고, 다른 하나는 오늘의 선택을 진실하게 한다.
건강한 어모털리티는 나이를 완전히 지우는 삶이 아니다. 나이에 붙어 있는 불필요한 금지표지를 떼어 내는 것이다. 몸의 한계를 인정하되 가능성을 미리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젊은 세대의 문화를 배우되 자기 세대의 지혜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되 지나온 생애를 실패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죽음을 준비하되 오늘 살아갈 일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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