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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엘리야, 죽음으로 믿음을 증명한 사명자 박관준 장로 이야기

OCJ 2026. 9. 21. 04:16

신앙은 시대의 어둠이 깊어질수록 그 빛을 더욱 선명하게 발합니다. 일제강점기라는 한국 역사의 가장 어두운 터널 속에서, 다수의 교회가 권력의 억압에 굴복하여 신사참배를 결의했을 때 끝까지 진리를 수호하며 목숨을 던진 한 평신도 사역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조선의 엘리야라 불리는 박관준 장로입니다. 오세아니아와 전 세계에 흩어져 살아가는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그의 이름은 다소 생소할 수 있으나, 그의 삶이 남긴 신앙의 궤적은 오늘날 세속주의와 타협하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묵직한 경종을 울립니다.

 


1875년 평안북도 영변의 대지주 가정에서 태어난 박관준은 청일전쟁으로 가산을 모두 잃고 가족의 죽음을 연이어 겪으며 깊은 인생의 허무에 빠졌습니다. 한때 방탕한 생활과 중병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그는 유교, 불교, 도교 등 여러 종교를 전전하며 진리를 갈망했습니다. 그러던 중 1905년 가을, 30세의 나이에 십자가 종교에 들어가라는 강력한 영적 음성을 듣고 기독교로 개종하게 됩니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을 통해 깊은 은혜를 체험한 그는 잃어버린 조국과 고통받는 민중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단합니다. 이후 피나는 노력 끝에 의사가 된 그는 육신의 질병뿐만 아니라 영혼을 구원하는 참된 치유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박관준 장로의 삶은 철저하게 성경적 가치관에 뿌리를 둔 순종의 여정이었습니다. 그는 평안남도 개천에 십자의원을 세우고 무의촌을 다니며 가난한 자들에게 무료로 의술을 베풀었습니다. 그에게 병원은 곧 복음을 전하는 전도소였고, 의술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도구였습니다. 환자들을 치료하며 전도에 힘쓴 결과, 당대의 지식인들과 유력자들에게도 복음의 씨앗을 심을 수 있었습니다. 이후 개천읍교회에서 장로로 장립받은 그는 신앙과 삶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본을 보였습니다.

그의 신앙이 역사적 사명으로 승화된 것은 1935년의 특별한 영적 체험 덕분입니다. 기도 중 환상 속에서 나를 위해 피를 흘릴 자가 누구냐는 주님의 물음에 그는 제가 피를 흘리겠나이다라고 결단하며 순교의 잔을 마시기로 서원합니다. 1938년 장로교 총회가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신사참배를 가결하는 치욕적인 사건이 벌어지자, 박관준 장로는 본격적으로 우상숭배 반대 투쟁에 나섭니다. 총독부와 도지사에게 수차례 경고문을 보내고 면담을 요구하던 그는, 합법적인 투쟁이 한계에 부딪히자 목숨을 건 거사를 계획합니다.

1939년 3월 24일, 64세의 노장로 박관준은 안이숙 사모, 아들 박영창과 함께 일본 도쿄의 제국의회에 잠입했습니다. 종교법안이 심의되던 중, 그는 2층 방청석에서 신사참배 강요를 규탄하는 진정서를 뿌리며 나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명자이다라고 사자후를 토했습니다. 적국의 심장부에서 우상숭배의 죄악을 꾸짖은 이 사건은 일본 열도를 발칵 뒤집어 놓았습니다. 현장에서 체포된 그는 국내로 압송되어 6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모진 고문과 옥고를 치렀습니다. 옥중에서도 70여 일간의 금식 기도를 단행하며 영적 전투를 쉬지 않았던 그는, 타협을 모르는 굳건한 믿음의 반석이었습니다.

박관준 장로의 결단은 당대 한국 교회와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첫째, 그의 삶은 교회의 제도적 타락 속에서도 남은 자들의 신앙이 살아있음을 증명했습니다. 총회마저 신사참배를 수용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한 평신도 장로가 보여준 결사 항전은 옥중에 있던 주기철 목사, 최봉석 목사 등 신앙 동지들에게 큰 위로와 용기를 주었고, 지하 교회의 신사참배 반대 운동에 불을 지폈습니다.

둘째, 그는 의료 선교의 진정한 모델을 제시했습니다. 십자의원이라는 이름처럼, 자신의 이익을 구하지 않고 오직 십자가의 사랑으로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돌본 그의 헌신은 지역 사회에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가 실천한 사랑은 말로만 그치는 복음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피와 땀으로 증명되는 살아있는 복음이었습니다.

셋째, 그의 투쟁은 일본 제국주의의 불의를 세계에 알리고 한국인의 영적 기개를 떨친 기념비적 사건이 되었습니다. 총칼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일본 제국의회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선포한 그의 외침은, 훗날 역사 속에서 한국 기독교가 자랑스럽게 물려줄 수 있는 순결한 신앙의 유산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오세아니아를 비롯한 현대의 다문화, 다원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에게 박관준 장로의 삶은 날카로운 도전을 던집니다.

첫째, 신앙의 본질은 타협하지 않는 순결함에 있습니다. 현대 사회는 신사참배처럼 물리적인 폭력으로 우상숭배를 강요하지는 않지만, 물질주의, 세속적 성공, 편의주의라는 세련된 우상 앞에 무릎 꿇기를 요구합니다. 박관준 장로가 시대의 대세에 순응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목숨을 걸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세상의 가치관에 휩쓸리지 않는 거룩한 저항 정신을 회복해야 합니다.

둘째, 부르심에 대한 즉각적이고 철저한 순종입니다. 60세가 넘은 노년의 안정된 삶을 뒤로하고 나를 위해 피를 흘리겠느냐는 주님의 부르심에 지체 없이 응답한 그의 모습은, 안락함만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의 신앙 태도를 반성하게 합니다. 진정한 십자가의 길은 편안한 자리가 아니라 사명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셋째, 신앙은 관념이 아니라 삶의 실천입니다. 영적 깨달음을 얻은 후 곧바로 의학을 공부해 이웃을 섬기고, 불의를 보았을 때 침묵하지 않고 행동으로 나선 그의 삶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증명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각자의 직업과 삶의 현장에서 복음을 살아내야 하는 사명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은 한번 죽을 때가 있나니 어찌 죽을 때 죽지 않으리. 예수 나 위해 죽으셨으니 나도 예수 위해 죽으리라. 박관준 장로가 옥중에서 신앙 동지에게 남긴 이 시는 그의 생애를 관통하는 고백이었습니다. 조국의 해방을 불과 5개월 앞둔 1945년 3월 13일, 70세의 노장로는 평양 기독병원에서 하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비록 그의 육신은 옥고와 금식으로 쇠약해져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의 영혼은 그 누구보다 강인하게 승리했습니다. 세속의 물결이 교회를 위협하는 오늘날, 조선의 엘리야 박관준 장로가 남긴 순교의 피는 여전히 살아서 우리를 일깨우고 있습니다. 우리도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제단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기꺼이 헌신하는 참된 사명자로 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도행전 20장 24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