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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영혼의 미술관

[영혼의 미술관] 어둠을 가르는 손가락, 그 찰나의 부르심

OCJ|2026. 1. 15. 07:35

— 카라바조의 <성 마태오의 소명>이 묻는 '나'의 자리

 


로마의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San Luigi dei Francesi) 성당, 그 안쪽 콘타렐리 채플(Contarelli Chapel)에는 4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수많은 순례자의 발길을 붙들어 온 그림이 하나 걸려 있습니다. 바로크 미술의 문을 연 천재이자 문제적 화가,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의 1600년 작, <성 마태오의 소명(The Calling of Saint Matthew)>입니다.

이 그림은 웅장한 천국이나 화려한 기적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대신 허름한 로마의 뒷골목 선술집 같은 어두운 방, 돈 세는 일에 골몰해 있는 세리들의 일상을 비춥니다. 오늘 우리는 이 그림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소음으로 가득 찬 우리의 일상을 뚫고 들어오는 '낯선 부르심'에 귀를 기울여 봅니다.

1. 정지된 시간: "나를 따르라"
그림의 오른쪽, 어둠 속에서 불쑥 나타난 두 사람이 있습니다. 맨발의 예수와 베드로입니다. 예수는 화면 왼쪽의 테이블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향해 팔을 뻗고 있습니다. 그의 입술은 다물어져 있지만, 그의 손가락은 침묵 속에서 웅변합니다. "나를 따르라."

이 장면은 마태복음 9장 9절의 순간을 포착한 것입니다. 하지만 카라바조는 성경의 거룩한 순간을 지극히 세속적인 공간으로 끌어내렸습니다. 테이블 위의 동전들, 값비싼 옷을 입고 칼을 찬 사내들, 그리고 무엇보다 짙게 깔린 어둠. 이것은 성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돈과 욕망, 생존의 문제로 치열한 오늘날 우리의 '세관' 풍경과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의 등 뒤에서 쏟아지는 한 줄기 빛(Chiaroscuro)은 마치 칼날처럼 어둠을 가르며 마태오의 얼굴을 비춥니다. 이 빛은 창문에서 들어오는 자연광이 아닙니다. 세상의 물리적 법칙을 무시하고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를 향해 직진하는 은혜의 빛(Lux Divina)입니다.

2. 두 번째 아담의 손: 창조에서 재창조로
예수의 손을 자세히 들여다보십시오. 미술사에 관심 있는 분이라면 이 손동작이 낯익을 것입니다. 바로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그린 <천지창조> 중 '아담의 손'입니다. 카라바조는 왜 예수의 손을 하나님(창조주)의 손이 아닌, 생기를 부여받는 인간 아담의 손처럼 그렸을까요?

신학적으로 예수는 '두 번째 아담'입니다. 첫 번째 아담이 죄로 인해 타락했다면, 두 번째 아담인 예수는 그 죄인들을 다시 살리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림 속 예수의 손은 힘없이 늘어지거나 수동적인 아담의 손과 달리, 누군가를 지목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양을 차용한 것은, 지금 이 부르심이 단순한 직업의 전환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New Creation)'의 순간임을 암시합니다.

세속의 탐욕 속에 죽어 있던 한 영혼에게 "일어나라"고 명하는 이 손짓은 태초에 흙으로 빚어진 인간에게 생기를 불어넣던 그 순간만큼이나 거룩하고 창조적입니다. 오늘 당신의 일상에도 이 '재창조의 손'이 향하고 있지 않습니까?

3. "저 말입니까?": 모호함이 주는 울림
이 그림의 백미는 "과연 누가 마태오인가?"라는 질문에 있습니다. 전통적인 해석에 따르면, 화면 중앙의 수염 난 남자가 마태오입니다.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검지 손가락으로 가슴을 가리키며 "저 말입니까?(Who, me?)"라고 묻는 듯합니다.

하지만 현대의 많은 미술사학자와 영성가들은 또 다른 해석을 내놓습니다. 수염 난 남자의 손가락이 자기가 아니라, 테이블 끝에 고개를 쳐박고 돈을 세느라 정신이 없는 '젊은 청년'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저 친구를 부르시는 겁니까?"라고 묻고 있다는 것이죠.

카라바조는 의도적으로 이 모호함을 남겨두었습니다.

만약 수염 난 남자가 마태오라면, 그는 부르심 앞에 당혹해하며 자신의 자격을 묻고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 같은 사람을 정말 쓰시렵니까?"

만약 고개를 숙인 청년이 마태오라면, 부르심은 아직 그에게 당도하기 '직전'의 찰나입니다. 빛은 이미 그의 머리 위를 비추고 예수의 손가락은 그를 향해 있지만, 그는 여전히 세상의 재물(동전)에 눈이 멀어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전율은 같습니다. 은혜는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여전히 죄인일 때, 여전히 세상에 코를 박고 있을 때 '침입'해 온다는 사실입니다.

4. 화가 카라바조: 살인자가 그린 구원
이 그림이 더욱 사무치는 이유는 화가 카라바조의 삶 때문입니다. 그는 성격이 포악하고 툭하면 싸움을 벌였으며, 결국 살인까지 저지르고 도망자 신세로 생을 마감한 '죄인 중의 괴수'였습니다. 그는 자신과 어울리던 거리의 부랑자, 사기꾼, 매춘부들을 모델로 성화(聖畫)를 그렸습니다.

<성 마태오의 소명> 속 인물들도 당시 로마 뒷골목의 타짜나 건달들의 모습입니다. 카라바조는 알았습니다. 거룩함은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비루하고 냄새나고 죄 많은 현실 한복판으로 뚫고 들어와야 한다는 것을. 예수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은 의인들의 회중이 아니라, 죄인들의 '세관'이었습니다.

어쩌면 카라바조는 마태오를 통해 자신의 구원을 갈망했는지도 모릅니다. "나 같은 살인자도, 나 같은 타락한 자도 저 손가락 끝에 닿을 수 있을까?" 이 그림은 붓으로 쓴 그의 처절한 참회록입니다.

맺음말: 당신의 세관에서 일어날 시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림 속 예수의 발을 보십시오. 그의 발은 이미 문 쪽을 향해 돌려져 있습니다. 이것은 '지나가는 중(Passing by)'임을 의미합니다. 부르심의 순간은 영원히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빛이 비치고, 손가락이 나를 지목하는 바로 그 '결정적 순간(Kairos)'에 응답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각자의 '세관'에 앉아 있습니다. 누군가는 성공의 동전을 세고 있고, 누군가는 걱정의 장부를 뒤적이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 일상의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예고 없이, 어둠을 가르고 당신을 지목하십니다.

당신은 지금 수염 난 남자처럼 "나 말입니까?"라고 되묻고 계십니까, 아니면 아직도 고개를 숙인 채 동전만 바라보고 계십니까? 분명한 것은, 그 손가락이 지금 당신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움켜쥐고 있던 것을 놓고, 그분을 따라나설 차례입니다. 빛은 이미 당신의 얼굴에 머물러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