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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영혼의 미술관

[영혼의 미술관] 탕자의 귀향, 그리고 아버지의 두 손

OCJ|2026. 1. 15. 06:52


— 렘브란트가 캔버스에 새긴 화해와 치유의 복음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박물관에는 전 세계에서 찾아온 관람객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하염없이 눈물을 훔치는 그림이 하나 있습니다. 미술사학자 케네스 클라크(Kenneth Clark)가 "지금까지 그려진 그림 중 가장 위대한 그림"이라고 극찬했던 작품, 바로 렘브란트 판 레인(Rembrandt van Rijn)의 <돌아온 탕자(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c. 1661–1669)>입니다.


이 그림은 단순히 성경 누가복음 15장의 이야기를 재현한 삽화가 아닙니다. 화려한 명성과 부를 모두 잃고,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을 먼저 떠나보낸 뒤 파산자가 되어 쓸쓸히 죽음을 기다리던 노년의 렘브란트가, 자신의 찢겨진 영혼을 담아 세상에 남긴 '시각적 유언'이자 '색채로 쓰인 복음서'입니다. 오늘 이 그림 앞에서 우리는 분주한 일상을 멈추고, 우리 신앙의 현주소를 묻는 거룩한 질문과 마주하게 됩니다.

1. 벗겨진 신발, 그리고 짓무른 발바닥
그림의 주인공인 작은 아들의 뒷모습을 보십시오. 그의 머리카락은 죄수나 노예처럼 짧게 깎여 있어, 그가 먼 타국에서 겪었을 수모와 잃어버린 존엄성을 대변합니다. 그가 걸친 옷은 누더기에 불과하며, 겉옷조차 없이 속옷 차림으로 아버지 품에 안겨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을 가장 아프게 붙드는 것은 그의 '발'입니다. 왼쪽 발은 신발이 벗겨져 맨발이 드러났고, 오른쪽 발의 신발은 닳고 닳아 뒤축이 다 터져 있습니다. 발바닥은 상처투성이이며 오랫동안 씻지 못한 떼가 묻어 있습니다. 이 낡은 신발 한 짝은 그가 걸어온 길이 얼마나 험난하고 고통스러웠는지를 침묵 속에 웅변합니다. 그는 자신의 욕망을 좇아 당당하게 집을 나갔으나, 돌아오는 길은 처참한 패배와 후회의 여정이었습니다.

이 탕자의 발은 오늘날 영적 싸움에 지친 성도들의 모습과 겹쳐집니다. 세상의 성공과 인정을 좇아 쉴 새 없이 달렸지만, 정작 영혼의 신발은 닳아버리고 마음은 상처 입은 채 교회 문을 들어서는 우리의 모습 말입니다. 렘브란트는 이 처참한 발을 그림의 가장 밝은 빛 중 하나로 비춥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의 화려한 성취가 아니라,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과 지친 발걸음이 은혜의 시작점이 되기 때문입니다.

2. 아버지의 두 손: 공의와 사랑의 신비
탕자의 어깨를 감싸 안은 아버지의 손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놀라운 비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헨리 나우웬(Henri Nouwen)을 비롯한 많은 영성가들이 지적했듯, 아버지의 양손은 서로 다른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왼손(아들의 어깨 위): 아버지의 왼손은 투박하고 강인하며 힘줄이 도드라져 있습니다. 이는 남성의 손이자 '아버지'의 손입니다. 아들을 굳게 붙잡아 주며,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보호와 힘,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와 권위를 상징합니다.

오른손(아들의 등 위): 반면 아버지의 오른손은 부드럽고 매끄러우며 섬세합니다. 이는 여성의 손이자 '어머니'의 손입니다. 상처 입은 아들의 등을 어루만지며 위로하는 자비와 긍휼, 그리고 모성적인 돌봄을 상징합니다.

렘브란트는 이 두 손을 통해 하나님 사랑의 온전함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악에서 건져내시는 강한 아버지이시면서, 동시에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는 따뜻한 어머니이십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실패하고 넘어져 돌아올 때, 하나님은 한 손으로는 우리의 무너진 삶을 지탱해주시고, 다른 한 손으로는 우리의 다친 마음을 어루만지십니다. 이 완벽한 포옹 안에서 탕자는 비로소 안식을 찾습니다.

3. 큰 아들의 시선: 우리 안의 바리새인
화면 오른쪽, 어둠 속에 서서 이 광경을 내려다보는 붉은 망토의 남자가 있습니다. 바로 '큰 아들'입니다. 그는 동생의 귀환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의 두 손은 옷자락 속에 감추어져 있거나 깍지를 낀 채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와 아버지 사이에는 물리적인 거리가 얼마 되지 않지만, 심리적인 거리는 좁혀지지 않을 만큼 멀어 보입니다.

큰 아들은 성실했습니다. 아버지의 명을 어긴 적이 없고, 도덕적으로 흠잡을 데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내게는 염소 새끼 한 마리 주신 적이 없더니"라며 불평합니다. 그는 아버지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규칙을 지켰을 뿐입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자격 없는 자'에게 베풀어지는 은혜에 대한 분노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우리에게 서늘한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혹시 우리는 탕자로 시작하여 은혜를 체험했으나, 어느새 신앙의 연수가 쌓이면서 큰 아들의 자리에 서 있지는 않습니까? 교회 안의 연약한 지체들을 보며 판단하고 정죄하는 마음, 나의 의로움을 내세우며 하나님의 파격적인 은혜를 불편해하는 마음이 우리 안에 있지는 않습니까? 렘브란트는 큰 아들의 얼굴에도 빛을 비추며, 그 역시 아버지의 잔치에 초대받아야 할 또 다른 형태의 '잃어버린 아들'임을 보여줍니다.

4. 케르크그라프(Kerkgraf): 가장 낮은 곳에서 완성된 걸작
이 그림이 더욱 숭고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화가 렘브란트의 삶 때문입니다. 젊은 시절 그는 자신을 탕자로 묘사했습니다(술집에서 아내를 무릎에 앉히고 술잔을 높이 든 자화상). 그러나 말년의 그는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파산 선고를 받았고, 사랑하는 아내 사스키아와 아들 티투스마저 먼저 떠나보냈습니다.

이 그림을 그릴 무렵, 그는 끼니를 걱정해야 할 만큼 가난했습니다. 그리고 1669년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에게는 묘비 하나 세울 돈이 없어서 '케르크그라프(Kerkgraf)', 즉 가난한 이들을 위한 공용 무덤에 묻혀야 했습니다.세상의 기준으로는 철저히 실패한 인생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가장 낮고 어두운 자리에서, 그는 평생을 갈구해온 빛을 만났습니다. 세상의 환호가 사라진 고요 속에서 그는 탕자가 되어 아버지의 품을 그렸고, 마침내 그 품에 안기는 평안을 얻었습니다. 이 그림은 성공한 화가의 화려한 대작이 아니라, 부서진 한 영혼이 하나님께 바치는 눈물의 고백록입니다.

맺음말: 이제는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은 때로 탕자처럼 길을 잃고 방황할 때가 있고, 때로 큰 아들처럼 마음이 굳어져 냉소적으로 변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렘브란트의 캔버스가 전하는 진리는 분명합니다. 우리가 어떤 모습이든, 아버지의 집에는 우리를 위한 자리가 예비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삶의 무게에 눌려 신발이 벗겨질 만큼 지쳐 있다면, 혹은 타인을 향한 판단으로 마음이 차갑게 식어 있다면, 이제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아버지의 두 손 사이로 들어가십시오. 강인한 왼손이 여러분을 붙들 것이며, 부드러운 오른손이 여러분을 치유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도 누군가에게 이 아버지와 같은 품, 판단하지 않고 껴안아 주는 '작은 아버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밤, 렘브란트의 빛이 여러분의 영혼 가장 깊은 곳을 따뜻하게 비추기를 소망합니다.

 

OCJ - 편집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