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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하는 신앙은 죄가 아닙니다: 고통의 신비 앞에서 길을 찾는 가나안 성도들을 위한 변증

OCJ|2026. 2. 8. 12:16

지적 정직성이라는 광야에 선 당신에게

"무조건 믿으라"는 말이 더 이상 영혼의 갈증을 채워주지 못할 때, 우리는 교회 문밖을 나섭니다. 흔히 '가나안 성도'라 불리는 이들은 신앙을 버린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맹목적인 순종보다는 정직한 질문을, 위선적인 평안보다는 불편한 진실을 택하며 하나님을 찾아 나선 '광야의 구도자'들입니다.

 

가나안 성도들이 마주하는 가장 큰 벽은 '악과 고통의 문제'입니다. 이태원 참사나 세월호 참사와 같은 사회적 비극이나 개인의 삶을 무너뜨리는 질병 앞에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상투적인 위로는 때로 폭력이 되어 다가옵니다. 오늘 우리는 이 고통의 신비, 즉 신정론(Theodicy)의 문제를 통해 우리 신앙의 자리를 재구성해보고자 합니다.

 

'신을 변호하기'를 멈추고 '신과 대화하기'

전통적인 신학은 하나님의 전능함과 선함을 논리적으로 방어하는 데 집중해 왔습니다. 하지만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이나 이유 없이 죽어가는 어린아이의 고통 앞에서 논리적인 '자유의지 변론'은 공허하게 들립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인문학적 거장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알베르 카뮈는 소설 『페스트』를 통해 고통의 원인을 신학적으로 설명하려 하기보다, 지금 당장 고통받는 자와 연대하는 '리외 의사'의 윤리를 제시합니다. 또한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엘리 위젤은 하나님을 피고석에 앉히고 '왜 언약을 어기느냐'고 항의합니다. 놀랍게도 성경은 이러한 저항을 '불신앙'이라 정죄하지 않습니다.

탄식과 저항: 성경이 가르쳐준 기도의 언어

우리는 욥기를 다시 읽어야 합니다. 욥의 친구들은 고난에는 반드시 이유(죄)가 있다는 인과응보의 논리로 신을 변호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마지막에 욥의 손을 들어주시며, 친구들의 말이 틀렸다고 선언하십니다. 욥의 위대함은 고통의 이유를 알아냈기 때문이 아니라, 끝까지 하나님을 붙들고 씨름하며 자신의 고통을 정직하게 대면했기 때문입니다.

 

시편의 3분의 1 이상은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라며 신의 부재를 고발하는 '탄식시'입니다. 하나님께 분노하고 따지는 것은 그분을 가장 심각하게 대면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가나안 성도들이 던지는 비판적 질문과 거룩한 분노는, 그 자체로 하나님을 향한 가장 깊은 기도의 다른 이름일 수 있습니다.

고통당하는 하나님, 우리와 함께 우시는 분

현대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은 "고통당하는 하나님만이 도울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이 높은 보좌 위에서 구경하시는 분이 아니라, 고통의 한복판으로 들어오신 사건입니다. 세월호의 찬 바다 속에, 이태원 거리에, 그리고 당신의 무너진 일상 속에 하나님은 방관자가 아닌 '동료 고난자'로 함께 계십니다.

 

자연의 잔혹함이나 이해할 수 없는 재해는 신의 심판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를 향해 나아가는 산고(産苦)일 수 있습니다. 신은 우리에게 명쾌한 답을 주시기보다, 그 고통의 과정을 함께 짊어지며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성숙한 불확실성을 향하여

가나안 성도 여러분, '덮어놓고 믿는 신앙'을 넘어서십시오. 해답이 없음을 견디는 용기가 바로 성숙한 믿음입니다. 확실성에 대한 강박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우리는 신비라는 하나님의 품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교회 밖에서 여러분이 행하는 고난받는 이웃과의 연대, 사회적 악에 대한 분노는 결코 세속적인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어 이 땅에서 '실천적 신정론'을 써 내려가는 거룩한 사역입니다. 당신의 의심은 죄가 아니며, 당신의 질문은 하나님께서 기꺼이 받으시는 예배입니다.

 

오세아니아의 광야 같은 삶 속에서, 질문을 멈추지 않는 당신의 여정을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내가 내 종 욥에게 노하노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 (욥기 42:7, NKRV)"

 

OCJ - 오세아니아 크리스천 저널 편집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