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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환 박사 시니어 칼럼 ⑤ 호모 헌드레드

OCJ 2026. 10. 6. 03:59

요나스 요나손의 소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은 한 노인의 100세 생일날로 시작된다. 요양원에서는 성대한 생일잔치가 준비되고 있었다. 시장과 기자들도 참석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정작 생일의 주인공 알란 칼손은 잔치에 관심이 없었다. 그는 슬그머니 창문을 넘어 슬리퍼 바람으로 요양원을 빠져나간다. 백 살 노인이 어디로 갈 수 있을까? 사람들은 그가 곧 붙잡혀 돌아올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에게는 뜻밖의 여행과 새로운 사람들, 예측할 수 없는 사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세계 현대사의 주요 사건을 모두 모아놓은 이 소설에서 급변하는 현대사의 주요 장면마다 본의 아니게 끼어들어 역사의 흐름을 바꿔 놓은 알란의 활약을 볼 수 있다. 전쟁에서 장군의 목숨을 구하고, 과학자들에게 핵폭탄 제조의 결정적 단서를 주고, 스탈린에게 밉보여 블라디보스토크로 노역을 갔다가 북한으로 탈출해 김일성과 아들 김정일을 만나기도 하며, 생생한 역사의 현장으로 독자를 이끈다. 백 년을 살아온 그의 철학과 모험을 따라가 보며 인생이란 무엇이고 행복이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소설은 다소 과장된 희극이지만, 그 첫 장면이 던지는 질문은 진지하다.

 

‘백 살은 모든 이야기가 끝나는 나이인가,

아니면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될 수도 있는 나이인가?’

 

알란이 ‘문’이 아니라 ‘창문’을 넘어갔다는 점도 흥미롭다. 문은 사회가 우리에게 마련해 놓은 정상적인 출구처럼 보인다. 은퇴하고, 활동을 줄이고, 조용히 지내다가 삶을 마무리하는 길이다. 그러나 창문은 정해진 통로가 아니다. 창문을 넘는다는 것은 “이 나이에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사회의 고정관념을 벗어버리는 행동처럼 보인다. 백 살 노인은 자기 생일잔치의 구경거리가 되기를 거부하고 다시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 된 셈이다.

 

우리는 지금 ‘호모 헌드레드(Homo Hundred)’ 시대를 살고 있다. 이는 백세 장수가 특별한 예외가 아니라 점차 보편적인 현실이 되어 가는 시대의 인간을 나타낸다. 2009년 유엔의 ‘세계인구고령화 보고서’에 ‘호모 헌드레드’가 사용되자, 장수와 고령화 시대의 상징어가 되었다. 인류는 오랫동안 장수를 추구했다. 환갑을 맞는 것도 큰 경사였고, 칠순과 팔순은 하늘이 내려 준 복으로 여겼다. 그러나 이제 환갑은 노년이 아니며, 8·90대의 건강과 활동은 당연하고, 100세 어르신들도 빠르게 늘고 있으니 건강수명, 의미수명을 논하게 되었다.

 

성경에는 120세를 산 모세가 등장한다. 신명기는 그의 마지막을 “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고 기록한다(신 34:7). 120세에도 눈이 흐리지 않고 기력이 쇠하지 않았다니, 오늘날 모든 사람이 바라는 건강장수의 모습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말씀이 “믿음이 좋으면 120세까지 건강할 수 있다”는 약속으로 해석되거나, 질병을 앓거나 신체 기능이 약해졌다고 해서 믿음이 부족하다고 해석되지는 않는다. 휠체어에 앉아 있거나 다른 사람의 돌봄을 받는 시니어들도 하나님 앞에서는 똑같이 존귀하다. 모세의 120세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마지막까지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감당했다는 사실이다.

 

모세의 생애는 대략 40년씩 세 시기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처음 40년은 이집트 왕궁에서 성장한 시기였다. 그는 왕자의 교육을 받으며 자신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다음 40년은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며 살았다. 왕궁의 신분도, 민족을 구하려던 열정도 사라진 듯한 시간이었다. 인간적으로 보면 가장 빛나는 시절을 허비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여든 살이 되었을 때 불붙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부르셨다.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출 3:10)

 

모세는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겠습니까?”라고 되물었다. 젊은 날에는 자기 힘으로 민족을 구하려던 사람이, 여든 살에는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는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신다.

모세에게 가장 중요한 생애는 여든 살 이후에 시작된 셈이다. 우리는 여든 살을 모든 일을 내려놓아야 할 나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성경 속 모세는 여든 살에 은퇴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소명을 시작했다. 그의 마지막 40년은 80년 동안 쌓은 능력을 과시하는 시간이 아니었으며,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동행을 의지하는 시간이었다.

 

물론 오늘의 80대가 모세처럼 민족을 이끄는 거대한 일을 시작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노년의 소명은 젊은 날의 소명과 다를 수 있다. 지휘하던 사람이 이제는 뒤에서 축복하는 사람이 되고, 많은 일을 하던 사람이 이제는 다음 세대의 말을 들어 주는 사람이 될 수도 있으며, 교회의 직분에서는 물러나도 기도의 자리에서는 물러나지 않을 수 있는, 노년의 소명은 ‘더 많은 일을 하는 것’보다 ‘더 깊은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세와 함께 떠올릴 인물이 갈렙이다. 갈렙은 40세에 가나안 땅을 정탐했지만, 약속의 땅에 정착하기까지 45년을 기다려야 했다. 마침내 85세가 되었을 때 그는 “오늘 내가 85세로되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도 내가 여전히 강건하니… 그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수 14:10-12)라고 여호수아에게 말했다. 갈렙은 편안한 평지를 달라고 하지 않았다. 아직 정복하지 못한 험준한 ‘산지’를 요청했다. 그의 강인함은 45년이 지나도록 하나님의 약속을 잊지 않은 ‘영적 지속성’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에게도 마지막까지 올라야 할 ‘산지’가 있을 수 있다. 그것은 반드시 새로운 사업이나 거창한 업적은 아니다. 오랫동안 멀어진 자녀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일이 ‘산지’가 될 수 있으며, 배우자에게 평생 하지 못했던 사과를 건네는 것일 수도 있다. 자신의 신앙 이야기를 손자 손녀들에게 들려주는 것, 젊은 세대를 비판하기보다 축복하는 것도 노년에 올라야 할 ‘산지’이다.

 

갈렙 이야기는 “나이가 들어도 젊은이처럼 살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고, 아직도 자신에게 응답해야 할 하나님의 약속이 있다는 믿음에 있다. 여든다섯 살에도 인생에는 아직 해야 할 ‘순종’이 남아 있을 수 있다. 모세와 갈렙은 매우 건강하고 강한 노인의 모습이나, 현실의 시니어 모두가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는 암과 싸우고, 어떤 이는 기억을 잃어 가며, 어떤 이는 침대와 휠체어에 의지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들은 호모 헌드레드 시대의 실패자인가?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의인은 종려나무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같이 성장하리로다…

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니.”(시 92:12-14)

 

노년의 결실은 젊은 날의 결실과 모양이 다르다. 젊은 날에는 ‘성취’가 중요했다면, 노년에는 ‘성숙’이 더 중요해진다. 젊은 날의 힘이 일을 해내는 능력이었다면, 노년의 힘은 사람을 품고 기다려 주며 축복하는 능력일 수 있다. 병상에서도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찾아온 사람의 손을 잡아 주고 “고맙다”고 말하는 것이 열매이다. 자녀의 수고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축복하는 것이 열매이다. 지난날의 잘못을 인정하고 화해를 청하는 것도 열매이다. 더 이상 긴 기도를 드리지 못해도,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열매이다.

 

그러므로 노년의 결실은 생산성이 아니라 ‘존재의 향기’라고 말하게 된다. 그래서 건강수명만으로는 좋은 노년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건강은 소중하지만 영원히 유지할 수는 없는 법이니, 건강이 약해진 뒤에도 사람에게는 사랑할 수 있는 능력, 감사할 수 있는 능력, 축복할 수 있는 능력이 남아 있다. 나는 이것을 ‘의미수명’이라고 부르고 싶다. 마지막까지 누군가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자신의 존재로 작은 선물을 남기는 기간이다. 건강수명은 끝날 수 있지만 의미수명은 생의 마지막까지 계속되면 좋겠다.

 

“나와 함께 늙어 갑시다.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으니.”

 

영국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의 시 〈랍비 벤 에즈라〉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 말은 젊음보다 더 화려한 성공이 기다린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평생 붙들고 살았던 것들을 하나씩 내려놓으면서도 끝내 사라지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게 된다는 뜻일 것이다. 직함이 사라져도 남는 이름, 건강이 약해져도 남는 사랑, 기억이 흐려져도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는 것이다. 100세 시대가 우리에게 준 것은 단순히 늘어난 햇수만이 아니라, 한 번 더 사랑하고, 한 번 더 화해하며, 한 사람을 더 축복할 수 있는 시간이다. 은퇴 이후의 20년이나 30년은 본래 인생에 덧붙여진 부록이 아니다. 그것도 엄연히 본문에 속한다.

 

그러나 오래 산다는 사실 자체가 삶을 완성하지는 않는다. 삶의 길이는 의학과 사회가 늘려 줄 수 있지만, 삶의 깊이와 방향은 각자가 찾아야 한다. 그러므로 호모 헌드레드에게 새로운 질문이 필요하다.

 

“나는 몇 살까지 살 것인가?”보다

“주어진 날 동안 무엇을 사랑할 것인가?”

 

“어떻게 젊음을 유지할 것인가?”보다

“나이가 들수록 어떤 사람으로 성숙할 것인가?”

 

“누가 나를 돌보아 줄 것인가?”뿐 아니라

“나는 오늘 누구를 축복할 것인가?”

 

-서울신학대학교 명예교수 김종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