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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환 박사 시니어 칼럼 ④ 노년의 존엄 : ‘당신은 나에게 상처 줄 수 없다’

OCJ 2026. 9. 29. 03:59

나이가 들면 마음도 무디어질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팔십 노인이 되어도 마음은 여전히 아플 때가 있다. 정성을 다해 키운 자녀의 냉담한 태도, 평생을 함께 살아온 배우자의 무심한 말 한마디 그리고 교회와 사회에 더 이상 필요 없는 존재라는 느낌은 노년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긴다. 
“아버지는 옛날 분이라 잘 모르세요” 
“어머니는 그냥 가만히 계세요”라는 말을 들을 때 시니어들은 서운함과 자신의 존재가 소멸되는 느낌마저 들기도 한다. 

 

여든두 살의 P 장로님은 얼마 전 갑자기 나타난 현기증으로 딸과 함께 GP를 만나러 갔다. 의사가 “어르신, 요즘 어디가 가장 불편하십니까?”라고 물었다.

 

박 장로가 천천히 대답하려는 순간, 옆에 있던 딸이 먼저 말을 받았다.

 

“아버지는 옛날 분이라 자기 상태를 잘 모르세요. 제가 말씀드릴게요.”
진료가 끝나자 의사는 약의 종류와 앞으로의 치료 방법을 딸에게 설명했다. P 장로님은 바로 곁에 앉아 있었지만, 대화는 그의 머리 위를 지나갔다. 의사도 딸도 그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그의 생각을 묻지는 않았다.
   

며칠 뒤에는 자녀들이 모여 아버지의 운전면허증을 반납하고, 은행 업무를 대신 관리하며, 앞으로 병세가 악화되면 장차 어느 요양시설로 모실 것인지 등을 의논했다. 아직은 혼자 생활할 수 있다고 말하였지만 자녀들은 “아버지는 그냥 저희가 하자는 대로 하세요. 다 아버지를 위해서 그러는 거예요.”라고 했다.
   

자녀들은 불효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아버지를 염려하고 사랑했다. 문제는 사랑의 부족이 아니라 방식이다. 아버지를 보호하려는 마음이 앞선 나머지,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는 인격체로 아버지를 대하지 않고, 돌보고 관리해야 할 대상으로 만들어 버리는 셈이다.

 


 이 이야기는 어느 한 가정만의 특별한 사례가 아니다. 병원 진료실과 은행, 교회와 가정에서 흔히 일어나는 노년의 풍경이다. 선한 의도로 시작된 돌봄이 어느 순간 한 사람의 목소리와 선택권을 빼앗는 셈이다. 노인은 가족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자신이 점점 투명인간이 되어 간다고 느낀다.

독일의 지성으로 불리는 게랄트 휘터(Gerald Hüther)의 책 《존엄하게 산다는 것》에는 ‘존엄(dignity)’을 삶의 방향을 알려 주는 ‘내면의 나침반’이라고 하면서, 인간이 다른 사람의 평가의 대상으로 취급될 때 존엄이 손상된다고 했다. 다른 사람을 내 뜻대로 움직여야 할 물건처럼 해서도 안 되지만, 나 자신을 타인의 평가에 맡겨진 물건처럼 여겨서도 안 되는 것이다.      

 

이 책에 “당신은 나를 상처 줄 수 없다.”는 도전적인 문장이 나온다. 처음에 선뜻 동의하기 어려웠다. 우리는 실제로 상처받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배신과 무시, 차별과 모욕은 분명히 아프다. 그러므로 이 말을 “상처받지 말라”거나 “마음이 강하면 아무렇지도 않아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될 것이다. 물론 평생을 참고 살아온 시니어들에게 또다시 감정을 억누르라고 요구해서도 안 된다. 
   

이 말의 참뜻은 “당신은 나를 아프게 할 수는 있으나, ‘나의 존엄’까지 결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누가 던진 말에 아플 수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의 말이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최종 판결이 되도록 허락할 필요는 없다. 상대의 행동은 그의 인격을 보여 주지만, 나의 가치를 결정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강인함은 상처받지 않은 척하는 데 있지 않으며, 상처를 정직하게 인정하면서도, 상처를 준 사람에게 내 존엄의 결정권까지 넘겨주지 않는 것이다.
   

노년에는 직장에서 물러나고, 교회 직분을 내려놓고, 건강이 약해지면 “나는 이제 쓸모없는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기 쉽다. 예전처럼 돈을 벌거나 봉사할 수 없다는 이유로 자신의 가치를 낮추는 셈이다. 그러나 사람의 존엄은 생산성에 비례하지 않는다. 기억력이 약해지고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해도 ‘인간의 가치-존엄’까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도움을 받는 것과 남의 뜻대로 다루어지는 대상이 되는 것은 전혀 다르다. 노년의 존엄은 모든 일을 혼자 해내는 데 있지 않다. 도움을 받으면서도 자기이름으로 존엄하게 불리어지고, 자신의 의견을 존중받으며, 가능한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데 있다.

휘터가 말하는 존엄은 신앙 안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성경은 인간의 가치가 능력이나 지위에 있다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귀하고 존엄한 존재이다. 세상의 직책에서는 은퇴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형상에서는 은퇴할 수 없다.
   

예수님은 앞을 보지 못하는 바디매오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다. 그의 형편을 이미 알고 계셨지만, 필요한 것을 일방적으로 결정하지 않으셨다. 먼저 그의 목소리를 들으셨다. 불쌍한 도움의 대상으로 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망을 말할 수 있는 한 ‘존엄한 존재’로 대하신 것이다. 
   

크리스천은 상처받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상처보다 더 깊은 곳에 정체성의 뿌리를 둔 사람들이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든, 하나님께서는 “너는 내 것이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고 말씀하신다(사 43:1). 타인의 말보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더 깊은 곳에서 나를 규정한다. 그러므로 시니어의 존엄에는 먼저 “그 말이 나를 아프게 했다”고 인정하는 용기와 “그러나 그 말이 나의 가치를 결정할 수는 없다”고 선언하는 용기 그리고 상처에 붙들려 남은 생애를 보내지 않고, 다시 사랑하고 선택하며 살아가는 용기가 필요한 셈이다.
   

용서한다고 해서 반드시 이전과 같은 관계로 돌아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화해를 시도해야 하지만, 때로는 안전한 거리를 두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원망이나 상대방의 평가가 내 남은 삶의 주인이 되게 하지 않는 것이다. 용서는 상대방의 잘못을 없던 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잘못이 내 삶을 계속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는 영적 자유일 수 있다.
   

물론 우리도 다른 사람의 존엄을 지켜 주어야 한다. 배우자의 말을 끝까지 듣고, 자녀들의 뜻을 먼저 물으며, 병들고 기억이 흐려진 사람도 인격적으로 대해야 한다. “당신을 위해서”라는 선의가 “당신 대신에” 모든 것을 결정하는 지배로 변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노년의 존엄과 강인함은 아무 상처도 받지 않는 굳은 마음이 아니다. 아픔을 느끼면서도 그 상처를 내 인생의 마지막 해석자로 세우지 않는 것이다. 

“당신은 나를 아프게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존엄, 그리고 남은 생애를 사랑할 자유까지 빼앗을 수는 없다. 상처가 내 삶의 마지막 말은 아니다. 마지막 말은 언제나 나를 지명하여 부르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있다.”고 다짐해 본다.
 

-서울신학대학교 명예교수 김종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