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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환 박사 시니어 칼럼 ③ 사별의 슬픔과 다시 살아갈 용기

OCJ 2026. 9. 21. 11:14

대학 동기 50여 명이 함께하는 단톡방이 있다. 젊은 날 같은 교정에서 공부하고 꿈을 나누던 친구들이 어느덧 70,80대가 되었다. 단톡방에는 아침 인사와 말씀과 찬양, 건강 이야기, 자손들 소식, 옛 추억과 유머가 오간다. 그 중에는 사랑하는 배우자를 먼저 떠나보낸 친구들도 적지 않은데, 지난 칼럼에서 금혼식 이야기를 쓰면서, 문득 이 친구들이 생각났다. 사별은 사랑의 끝일까? 아니면 사랑을 품고 살아가는 방식이 달라지는 것일까?

 


C. S. 루이스는 사랑하는 아내를 암으로 잃은 뒤 깊은 슬픔에 빠졌다. 그 고통을 《헤아려 본 슬픔》에 정직하게 기록했다. 뛰어난 기독교 변증가였던 그도 사별 앞에서 하나님이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졌다. 기도문이 닫힌 것 같았고, 신앙이 흔들리는 경험을 했다. 그는 신앙이 깊으면 슬픔이 작아지는 것이 아님을 보여 준다. 깊이 사랑했기 때문에 많이 아픈 것이다. 


예수님도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셨다.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을 알고 계셨지만, 유족과 조문객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위로는 곁에 앉아 함께 울어 주는 것이다. 바울도 “슬퍼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말라”고 했다(살전 4:13). 그리스도인은 슬픔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슬픔 속에서도 다시 만날 소망을 품는 사람이다.


죽음학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죽음을 마주한 사람들이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과 같은 반응을 보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른바 ‘죽음의 5단계’이다. 이 이론은 죽음과 사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애도란 언제나 이 순서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슬픔은 다섯 계단을 하나씩 올라 마침내 졸업하는 과정이 아니라, 어느 날은 사별을 수용하는 것 같기도 하다가도, 결혼기념일이나 익숙한 찬송 한 곡, 빈 의자와 오래된 옷을 보며 다시 눈물을 흘릴 수 있다. 분노와 그리움, 감사와 죄책감이 한꺼번에 찾아오기도 한다. 그렇다고 애도에 실패한 것이 아니다. 슬픔은 직선이 아니라 파도와 같다. 잠잠해진 것 같다가 다시 밀려오며, 시간이 흐르면 파도의 간격과 높이가 조금씩 달라진다. 그러므로 “이제 그만 털고 일어나세요”라는 말은 위로가 되기 어렵다. 슬픔이 다시 찾아오는 것은 믿음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만큼 깊이 사랑했기 때문이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에는 배우자를 잃은 한 노의사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2년 전 가장 사랑했던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 심한 우울증에 빠져 카운슬링을 신청하고 프랭클을 찾아왔다. 프랭클은 그에게 한 가지 질문을 했다.


   “선생님이 먼저 세상을 떠나고 부인이 남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노의사는 대답했다.
   “아내에게는 끔찍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아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했겠습니까.”


   그러자 프랭클은 말했다.
   “부인은 그 고통을 면했습니다. 선생님이 부인에게 그 고통을 겪지 않게 해 준 것입니다. 그 대가로 이제 선생님이 살아남아 아내를 애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노의사는 아무 말 없이 프랭클의 손을 잡더니 조용히 진료실을 떠났다.


아내의 죽음도 남편의 슬픔도 사라지지 않았다. 프랭클이 그의 우울증을 몇 마디로 완전히 치료했다는 뜻도 아니다. 다만 무의미한 형벌처럼 느껴지던 고통이 사랑하는 아내를 대신하여 자신이 감당하는 마지막 희생으로 새롭게 해석된 것이다. 고통의 의미를 안 셈이다. 그래서 이를 ‘의미료법(Logotherapy)'이라고 한다. 사별의 고통은 없애야 할 병증만이 아니라, 때로는 사랑한 만큼 감당해야 하는 사랑의 값이기도 하다. “왜 나만 남아서 이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당신이 당했을 고통을 내가 대신 감당하고 있구려!”라는 의미로 바뀔 때, 슬픔 속에서도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자신의 슬픔을 이와 같이 해석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마다 사랑의 역사와 상실의 사정이 다르다. 심한 우울과 불면, 삶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계속될 때에는 신앙만으로 참으려 하지 말고 상담과 의료적 도움을 받아야 한다. 도움을 청하는 것은 믿음이 약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용기이다.

배우자를 먼저 떠나보낸 뒤 살아가는 모습은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이는 고인의 기억을 품고 홀로 살아가며, 어떤 이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 다시 가정을 이룬다. 어느 길이 더 충실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물론 재혼이 떠난 배우자를 잊거나 배신하는 일이 아니다. 새로운 배우자를 먼저 떠난 사람의 대용품으로 여기는 것도 아니다. 과거의 사랑을 소중히 간직하면서도 지금 만난 한 사람을 온전한 인격으로 존중하고 새롭게 사랑하는 일이다.

 

성경도 배우자와 사별한 사람이 “주 안에서” 다시 혼인할 자유가 있음을 언급한다(고전 7:39). 물론 홀로 살아가는 것도 새로운 삶을 거부하거나 애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뜻이 아니다. 혼자이면서도 친구와 가족, 교회 공동체 안에서 충만한 관계를 이루며 살아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이 정해 놓은 시간표가 아니라, 자신의 슬픔과 사랑을 정직하게 받아들이며 오늘의 삶을 선택하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에는 지나간 사랑에 감사하면서 새로운 사랑을 받아들일 공간이 함께 존재한다.

 

사랑은 앞의 사람을 지워야 다음 사람을 쓸 수 있는 칠판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날 애도상담에서는 떠난 사람을 완전히 잊고 관계를 끊는 것만이 회복이라고 보지 않는다. 배우자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와의 관계는 기억과 감사, 삶의 가치 속에서 계속될 수 있다. 이를 ‘지속적 유대’라고 한다.

 

고인의 사진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말을 건네는 것, 함께 즐겨 듣던 음악을 듣는 것, 결혼기념일에 좋아하던 음식을 가족과 나누는 것도 자연스러운 애도이다. 배우자가 소중히 여기던 신앙과 봉사, 가족 사랑을 이어 가는 것은 그 사랑이 오늘의 삶에서 열매 맺게 하는 방법이다. 또한 다시 웃고, 여행하고, 친구를 만나며, 때로는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것은 떠난 배우자를 배신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사랑했던 사람이라면 남은 배우자가 죄책감 없이 잘 살아가기를 바랄 것이다.

루이스는 사별한 사람에게 충분히 울 권리를, 퀴블러 로스는 슬픔에 여러 얼굴이 있음을 알려 주었고, 프랭클은 그 눈물 속에서도 다시 살아갈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성경은 죽음이 사랑과 생명의 마지막 말이 아니라,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다.”(아 8:6)고 약속한다.

오늘도 대학 동기들의 단톡방에는 아침 인사와 말씀과 찬양, 건강을 염려하는 글이 올라온다. 그 짧은 인사 뒤에는 먼저 떠난 배우자를 그리워하며 홀로 아침을 맞은 친구도 있고, 새로운 배우자와 하루를 시작하는 친구도 있다. 친구여, 떠난 사람을 억지로 잊지 않아도 된다. 눈물이 다시 흐른다고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

 

홀로 살아가든 새로운 사람과 다시 길을 걷든, 그것은 사랑했던 사람을 잊는 일이 아니다. 고인이 남긴 사랑은 새로운 삶을 가로막는 벽이 아니라, 다시 사랑하고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힘이 될 수 있다. 사별은 사랑의 흔적을 지우지 않는다. 다만 사랑을 품고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달라질 뿐이다. 떠난 사랑은 기억 속에 남고, 우리의 삶은 그 사랑을 품은 채 다시 이어진다.  


이글을 쓰면서 3년 전에 소천하신 빙모님을 그리워한다. 어머님께서는 40대에 사별하시고 홀로 6남매를 양육하시고, 성혼하여 가정을 이루게 하셨으며, 증손까지 돌보시는 50년을 홀로 지내셨다. 교회에서 장로님으로 주님을 섬기는 행복으로 사시면서 100세수를 누리셨다. 어머님 그립습니다.

 

-서울신학대학교 명예교수 김종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