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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목회 칼럼

원고지라는 겟세마네를 통과하지 않은 말씀은 '폭력'이다

OCJ|2026. 6. 10. 06:18

오늘날 우리는 인공지능(AI)이 단 몇 초 만에 신학적으로 매끄럽고 문법적으로 완벽한 설교문을 출력해 내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기술의 진보는 우리에게 편리함을 주었지만, 역설적으로 '강단의 진정성'이라는 본질적인 질문 앞에 우리를 세웁니다. 이제 설교자는 단순히 '무엇을 말할 것인가'를 넘어, '그 말이 내 영혼을 먼저 관통했는가'라는 엄중한 시험대에 올랐습니다. 

 


목회자들에게 '십자가', '은혜', '사랑'과 같은 단어들은 가장 익숙한 도구인 동시에 가장 위험한 함정이기도 합니다. 이 거룩한 단어들은 때로 설교자 자신에게 일종의 '영적 면죄부'를 제공합니다. 정작 본인의 삶은 그 말씀 앞에 깨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신학적으로 정교한 용어들을 나열함으로써 스스로가 그 진리 안에 살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준비되지 않은 설교자가 강단 위에서 쏟아내는 뜨거운 감정과 수려한 언변은 종종 '영적 폭력'으로 변질됩니다. 자기 자신조차 설득하지 못한 메시지, 자신의 심장을 떨리게 하지 못한 문장을 회중에게 강요하는 것은 복음의 선포가 아니라 종교적 에너지를 전이하려는 권력 행위에 가깝습니다. 설교자가 먼저 그 말씀 앞에 거꾸러지지 않는다면, 그 설교는 회중의 영혼에 가닿지 못한 채 허공을 맴도는 소음이 될 뿐입니다.

이러한 영적 타성과 안일함을 깨뜨리는 가장 강력한 도구는 역설적이게도 고독한 '글쓰기'에 있습니다. 말은 빠르고 유연하며 즉흥적이지만, 글은 느리고 정직하며 집요합니다. 설교자가 원고지 앞에 앉아 한 문장 한 문장을 씨름하는 과정은 단순히 원고를 작성하는 행위를 넘어, 자기 내면의 논리적 허점과 영적 위선을 발가벗기는 '자기 성찰의 시간'입니다.

활자로 기록된 문장은 설교자에게 끊임없이 묻습니다. "너는 정말 이 문장을 믿는가?", "이 고백이 너의 삶과 일치하는가?" 이 고통스러운 질문 앞에서 설교자는 자신이 사용하던 종교적 수사들이 얼마나 공허했는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글쓰기는 설교자가 강단에 서기 전, 원고지라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신을 먼저 제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문장을 다듬고 고치는 과정은 곧 설교자 자신의 인격과 영성을 깎아내는 성화(Sanctification)의 과정이어야 합니다.

AI가 복제할 수 없는 유일한 영역은 '말씀과 함께 살아낸 설교자의 고통'입니다. 훌륭한 설교는 매끄러운 논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신음하며 써 내려간 정직한 고백에서 나옵니다. 강단 위에서의 화려한 즉흥성에 기대기보다, 골방에서 원고와 사투하며 자신의 무능함을 직면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동역자 여러분, 그리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다시 '기록된 말씀'의 무게를 회복해야 합니다. 설교자가 원고를 쓰며 먼저 울지 않는다면, 회중의 눈물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설교자가 먼저 말씀에 설득당하지 않는다면, 세상을 변화시키려 하지 마십시오. 글쓰기라는 엄중한 자기 검열을 통해 우리 강단이 '매끄러운 강연'이 아닌 '살아있는 계시의 현장'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원고지 위에서 먼저 죽은 설교자만이 강단 위에서 비로소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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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이 좋은 말로 왕을 위하여 지은 것을 말하리니 내 혀는 글씨를 잘 쓰는 서기관의 붓끝과 같도다" (시편 45:1)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예레미야 20:9)

OCJ 편집실에서 김 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