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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벤에셀의 궤적과 디아스포라의 신학: 찬송가 301장 '지금까지 지내온 것'의 역사적 여정과 오세아니아 목회적 적용

OCJ|2026. 6. 7. 06:14

 

서론: 한인 교회의 영적 DNA와 디아스포라의 고백

전 세계에 흩어진 한인 디아스포라 교회와 조국 교회의 성도들이 송구영신 예배, 신년 감사 예배, 창립 기념일, 임직식, 그리고 개인의 생일과 같은 삶의 결정적이고 영적인 마디마다 결코 빼놓지 않고 부르는 찬송이 있습니다. 바로 새찬송가 301장(통일찬송가 460장) '지금까지 지내온 것'입니다. 이 찬송은 단순히 과거의 은혜를 감상적으로 회고하는 서정적인 노래에 머물지 않습니다. 이 찬양은 극심한 생존의 위기와 고난, 국가적 상실과 개인적 절망 속에서도 역사를 주관하시고 개인의 삶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철저하게 인정하는 가장 강력한 신앙고백의 결정체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 찬송의 역사적 형성 경로는 단일한 문화권이나 단일한 인물에 의해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그 기원과 발전 과정을 추적해 보면, 서구의 복음주의 신앙에서 잉태되어, 이국땅에서 방황하던 일본인 유학생의 회심을 거쳐 초기 일본 성결 운동의 불길로 타올랐고, 일제강점기 치하의 암울했던 한국 땅에 번역·이식되어 핍박받는 성도들의 영혼을 지탱했으며, 마침내 해방과 6·25 전쟁이라는 민족적 비극을 통과한 한국인 작곡가의 독창적인 선율과 결합하여 토착적 찬송가의 완성본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한 편의 찬송가가 영국과 미국, 일본, 그리고 한국을 거쳐, 오늘날 오세아니아 지역을 비롯한 전 세계 한인 디아스포라 교회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구속사적 궤적을 그리며 흘러온 것입니다.

오세아니아 크리스천 저널(OCJ)은 목회 기획 심층 리포트를 통해 찬송가 301장의 작사자인 사사오 테츠사부로(笹尾鐵三郞) 목사와 작곡자인 박재훈 목사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입체적으로 조명하고자 합니다. 나아가 서양의 전통 곡조에서 한국적 선율로 탈바꿈하게 된 역사적 비하인드 스토리와 가사 전반에 담긴 신학적 의미를 교회사적 관점에서 분석하고, 이 에벤에셀의 신학을 오늘날 오세아니아 지역의 이민 교회와 목회 현장에 어떻게 실천적으로 적용할 수 있을지 심도 있는 통찰을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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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가사의 기원: 사사오 테츠사부로의 디아스포라 경험과 에벤에셀의 신학

1. 세속적 야망과 이민, 그리고 극적인 회심


찬송가 301장의 원작사자는 일본의 성결 운동과 복음주의 신앙의 선구자로 추앙받는 사사오 테츠사부로(T. Sasao, 1868-1914) 목사입니다. 그의 생애는 본질적으로 고국을 떠나 이국땅에서 생존해야 했던 '디아스포라(Diaspora)의 경험'과 깊이 맞닿아 있습니다. 사사오는 1868년 일본 미에현 츠시의 불교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경제적·정서적 결핍 속에서 성장해야 했습니다. 그는 중학교를 졸업한 후 당대 최고의 명문이던 게이오기주쿠대학 이재과(理材科, 현대의 경제학 전공)에 진학하여 탁월한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당시 그의 내면을 지배했던 것은 세속적인 성공과 막대한 부를 축적하겠다는 강렬한 야망이었습니다. 그는 이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1888년, 무역업자로 성공하겠다는 포부를 안고 미국 캘리포니아로 이민과 유학의 길에 올랐습니다.

미국으로 향한 그의 목적은 결코 영적인 진리를 탐구하거나 기독교 신앙을 갖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19세기 말 아시아계 이민자들이 공통적으로 품었던 세속적 부흥과 입신양명의 목적이 전부였습니다. 그는 캘리포니아주 산호세의 퍼시픽 상대에 입학하였고, 심지어 본국의 징병을 피하기 위해 현지에서 사사오(笹尾) 가문으로 입양하여 성(姓)을 바꾸는 등 세상적인 생존과 안위를 위해 철저하게 적응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샌프란시스코에서 한 목사가 운영하던 하숙집에 머물게 되면서 그의 인생은 전혀 예기치 못한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하숙집 주인이던 다지 목사 부인의 헌신적이고 끈질긴 전도를 통해, 이방의 종교라 여겼던 기독교의 복음을 듣게 된 것입니다. 1888년, 경제적 목적만을 위해 타국을 밟았던 그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고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사오의 극적인 회심 과정은, 경제적 생존이나 학업을 위해 해외로 이주했다가 이민 교회와 신앙 공동체를 통해 십자가의 복음을 접하게 되는 수많은 현대 한인 디아스포라 성도들의 궤적과 놀라울 정도로 정확히 일치합니다.

2. 소명의 발견과 동족 전도를 향한 헌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직후, 사사오의 가치관과 인생의 목적은 송두리째 뒤집혔습니다. 돈을 벌어 입신양명하겠다는 세속적 욕망은 그리스도를 아는 고상한 지식 앞에서 철저히 배설물로 여겨졌습니다. 그는 명문 대학에서의 학업을 중퇴하고,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전도 집회에 참석하여 자신의 전 생애를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서원했습니다.

이후 그는 샌프란시스코 일본인 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장과 전도사로 섬겼으며, 감리교인 가와베 데이끼지(河貞吉) 등과 동역하며 시애틀 등지에서 이민자들을 위한 전도 사역에 매진했습니다. 과거의 자신처럼 오직 세속적 야망에 사로잡혀 낯선 이국땅을 밟은 동족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것을 자신의 새로운 사명으로 삼은 것입니다. 그는 이 시기 철저한 회개와 성결의 복음을 체험하며 목회자로서의 영적 근력을 키워나갔습니다.

3. 고국 귀환과 복음주의 운동, 그리고 찬송 시의 탄생


디아스포라 현장에서의 사역을 거쳐, 사사오는 26세 때 일본 전역의 영적 부흥을 위한 사명을 띠고 목사 안수를 받은 뒤 고국으로 귀환했습니다. 일본으로 돌아온 그는 서구 복음주의 신앙의 정수를 일본에 전수하고 있던 영국 성공회 선교협회 선교사 바클레이 F. 벅스톤(Barclay Fowell Buxton, 1860-1946)을 만나 그의 영적 지도를 받게 됩니다. 벅스톤은 본래 미국을 강타했던 당대 최고의 부흥사 D. L. 무디(Dwight L. Moody)의 집회에서 깊은 은혜를 받고 일본 선교사로 헌신한 인물로, 사사오의 신학적 뿌리에 영미권 복음주의의 강력한 불길과 성결의 영성을 심어주었습니다.

1894년(일부 자료 1897년), 사사오는 자신이 미국 땅에서 뼈저리게 경험했던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구원의 감격을 동족들에게도 노래로 전하고자 벅스톤 선교사의 지도를 받아 찬송집 편찬 작업에 돌입했습니다. 그는 마쓰노 기꾸따로(松野菊太郞)와 함께 수많은 영미권 찬송가를 번역하고 창작하여 일본 홀리네스 교단의 최초 찬송가인 『구원의 노래』(救いの歌)를 편집 및 발행했습니다. 이 역사적인 찬송집에 수록된 수많은 곡 중 하나가 바로 "今日まで守られ(오늘까지 지켜주시고)"라는 원제를 가진 시, 즉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301장 '지금까지 지내온 것'입니다.

이 가사의 밑바탕에는 철저하고 깊은 성경적 토대가 깔려 있습니다. 사사오 목사는 구약성경 사무엘상 7장 12절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에벤에셀)"는 위대한 고백과, 신약성경 로마서 8장 28절의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는 구속사적 섭리의 말씀을 뼈저리게 묵상하며 이 시를 지어 내려갔습니다. 세속적인 야망이 꺾이고 낯선 타국에서 외로운 나그네가 되었으나, 도리어 만유의 주재이신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된 자신의 삶 전체가 철저히 인간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위대하신 은혜(God's great grace)였음을 만천하에 고백한 것입니다.

사사오는 이후 벅스톤 선교사의 소개로 나카다 쥬지(中田重治)를 만나 1901년 동양선교회(OMS) 성서학원 교수로 재직하며 일본 초기 성결 운동과 순복음(Full Gospel) 운동의 핵심 지도자로 활약했습니다. 그는 독립적으로 규슈에서 홋카이도까지 일본 전역을 순회하며 불꽃같은 전도 집회를 이끌다, 1914년 46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과로로 소천하여 자신이 그토록 찬양하던 '고향 집' 하나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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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한국으로의 이식과 암흑기 속의 위로: 이장하 목사의 번역

D. L. 무디로부터 벅스톤을 거쳐, 사사오 테츠사부로로 이어졌던 뜨거운 복음주의와 성결 운동의 맥은 사해를 건너 한반도의 교회들에도 강력하게 이식되었습니다. 이 거룩한 신앙의 유산을 한국에 전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한 인물은 바로 사사오의 제자이자, 한국 성결교회의 초기 신학자 및 지도자였던 이장하(李章夏, 1886-1935?) 목사였습니다.

이장하 목사는 1905년 만국성결교회(OMS) 산하로 세워진 한국 성결교회의 첫 통역자로서, 초기 선교사 토마스(John Thomas)와 함께 한국 신학 교육의 중추적인 기초를 놓은 인물입니다. 그는 사사오 테츠사부로 등 일본 성결교회 지도자들의 영성과 신학이 응축된 일본어 찬송가들을 한국 성도들이 모국어로 부르며 은혜를 누릴 수 있도록 방대한 번역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1919년, 이장하 목사가 주도하여 번역하고 토마스 부인 등의 조언을 거쳐 선별한 곡들이 한국 성결교단이 발행한 『신증복음가』에 수록되었는데, 그중 46장에 사사오 목사의 "今日まで守られ"가 최초로 한국어 번역되어 소개되었습니다.

1919년은 한국 역사상 가장 비극적이면서도 민족의 주체성이 폭발했던 3·1 운동이 일어난 해였습니다. 국가적 주권을 상실하고 극심한 일제의 탄압과 경제적 수탈, 그리고 끝을 알 수 없는 절망 속에 놓여 있던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장하 목사가 번역한 이 찬송의 가사는 단순한 노래를 넘어선 영적 피난처요, 엄청난 위로와 종말론적 소망의 선포였습니다. 당시 이장하 목사가 번역했던 초창기 1절 가사는 현재 우리가 부르는 가사와는 사뭇 달랐습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혤세 / 사랑으로 보호하심 어찌 의심하리요 / 언제든지 나의 주는 사랑하는 은혜로 / 모든 일을 아름답게 이루어서 주시네."

특히 후반부의 "모든 일을 아름답게 이루어서 주시네"라는 번역은 매우 탁월한 신학적 통찰을 보여줍니다. 이는 현재 한반도가 처한 칠흑 같은 식민 치하의 고난과 개인의 억압조차도 궁극적으로는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거대한 섭리 안에서 가장 선하고 아름답게 종결될 것임을 확신하는 굳건한 신앙고백이자 종말론적 신앙의 표출이었습니다. 식민 치하의 숨 막히는 압박 속에서 내일을 기약조차 할 수 없었던 초기 한국 성도들은, 이 찬송을 눈물로 부르며 하나님께서 조국의 아픔과 개인의 연약함을 언젠가 선하게 빚어내실 것을 철저히 신뢰했습니다.

이후 시간이 흘러 1935년 장로교 측에서 발행한 『신편찬송가』 358장에 이 곡이 수록되는 과정에서, 당대 최고의 문장가였던 춘원 이광수(李光洙)의 수려한 다듬기를 거치게 되었습니다. 이광수의 수준 높은 윤문을 통해 가사의 운율, 서정성, 그리고 문학적 감동이 한층 배가되었으며, 이 과정을 통해 원가사가 지니고 있던 투박함이 세련된 한국의 시적 정서로 승화되어 오늘날 우리가 애창하는 형태에 가깝게 완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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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선율의 토착화: 네틀톤(NETTLETON)에서 한국적 창작 선율로

찬송가 '지금까지 지내온 것'이 가사의 측면에서는 일본의 성결 영성을 거쳐 한국어 번역 과정을 통해 문학적 토착화를 이루어냈다면, 음악적인 측면에서 서양의 외피를 벗고 완전히 한국 고유의 정서를 입게 된 것은 해방 이후 한국 교회음악의 거목인 박재훈 목사를 통해서였습니다. 찬송가 곡조의 변천사는 한국 교회가 서구 선교사들의 음악적 그늘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신앙의 노래를 갖게 되는 역사적 궤적을 대변합니다.

1. 초기 서양 곡조 혼용 시대와 개편의 필연성


1919년 이장하 목사에 의해 이 찬송이 처음 번역되어 불릴 당시부터 해방 직후까지, 한국 교회는 이 가사에 맞추어 미국의 작곡가 존 와이어스(John Wyeth)가 작곡한(일부 문서에서는 Asahel Nettleton의 명의로 기록됨) 전통적인 서양 민요풍의 곡조인 '네틀톤(NETTLETON)'을 사용했습니다. 이 선율은 오늘날 우리가 찬송가 28장 '복의 근원 강림하사'를 부를 때 사용하는 바로 그 익숙한 곡조입니다.

기독교 초기, 부족한 곡조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의 선율에 여러 개의 가사를 붙여 부르는 이른바 '콘트라팍툼(Contrafactum)' 현상이 빈번했습니다. 해방 후인 1949년에 여러 교단이 연합하여 발행한 『합동찬송가』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극에 달하여, 단일한 네틀톤 곡조 하나에 '복의 근원 강림하사', '지금까지 지내온 것', '눈을 들어 산을 보니' 등 무려 3개의 전혀 다른 주제의 가사가 무분별하게 혼용되어 불리는 기현상이 발생했습니다. 이는 예배의 집중도를 흩뜨리고 각 가사가 지닌 고유한 영적 정서를 온전히 살리지 못하는 치명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고자 1967년 발행된 『개편찬송가』 편찬위원회는 "한 곡조에는 오직 하나의 가사만 결합한다(1 Tune, 1 Lyric)"는 엄격하고도 학문적인 원칙을 찬송가 편찬의 대전제로 도입했습니다. 이 원칙에 따라 네틀톤 곡조는 전 세계적 보편성을 지닌 송영 찬송인 '복의 근원 강림하사' 전용으로 지정되었고, '눈을 들어 산을 보니'는 해당 찬송가에서 탈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지내온 것'은 수십 년간 한국 성도들의 가슴속에 너무나 깊이 뿌리내린 핵심 애창곡이었기에 결코 찬송가에서 뺄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이 가사만을 위한 완전히 새로운 곡조를 창작해야만 하는 중대한 과제가 주어졌고, 편찬위원회는 이를 공모에 부쳤습니다.

2. 박재훈 목사의 등장과 한국적 정서의 응축


이 역사적인 공모전에서 당선되어 오늘날 우리가 눈물로 애창하는 고유의 선율을 탄생시킨 인물이 바로 '한국 교회음악의 아버지'라 칭송받는 박재훈(1922-2021) 목사입니다. 그는 당시 서양음악의 문법에 충실하면서도, 한국인의 심연에 흐르는 고유한 서정성과 한(恨), 그리고 그것을 승화시키는 영적인 의지를 선율에 놀랍도록 완벽하게 녹여냈습니다.

박재훈이 이토록 한국적인 음악을 창조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깊은 음악적 성찰과 만남이 존재했습니다. 신앙적으로나 음악적으로 서양 고전주의의 보수적 성향이 강했던 박재훈은, 귀국 후 동년배이자 일본 유학파였던 천재 작곡가 나운영을 만나면서 음악적 정체성에 거대한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실험적이고 한국 음악의 토착화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나운영의 실력을 깊이 인정한 박재훈은 자존심을 내려놓고 그에게 수개월간 직접 음악을 사사했습니다. 서양음악의 엄격한 화성학적 틀 안에 갇혀 있던 그가 민족 고유의 정서와 한국적인 리듬의 가능성으로 눈을 돌리게 된 결정적 계기였습니다. 바로 이 시기, 보수적 신앙의 깊이와 한국적 선율의 토착화라는 실험 정신이 융합되면서 탄생한 걸작들이 바로 '지금까지 지내온 것',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산마다 불이 탄다' 등이었습니다.

1983년 보수 진영과 진보 진영이 연합하여 발행한 『통일찬송가』에는 초기 한국 교회의 향수를 고려하여 기존의 서양 곡조(네틀톤)와 박재훈의 곡이 잠시 나란히 실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어 가사의 고유한 억양과 정서에 완벽하게 밀착된 박 목사의 토종 곡조가 성도들의 영혼을 훨씬 더 깊이 울리며 압도적인 사랑을 받게 되었고, 결국 서양 곡조는 자연스럽게 자취를 감추고 한국적 선율만이 단독으로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제4부 작곡자 박재훈 목사의 생애: 시대의 비극을 찬송으로 승화한 헌신의 여정

'지금까지 지내온 것'의 뼈대에 생명을 불어넣어 완성시킨 박재훈 목사의 삶 그 자체도 가사의 고백 못지않게 한국 근현대사의 파란만장한 역사적 질곡을 온몸으로 통과했습니다. 그는 찬송가 작곡가로서 위대할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널리 불리고 사랑받는 동요들의 창조자이자, 디아스포라 교회를 일군 헌신적인 목회자였습니다.

1. 피난민과 고아의 눈물을 닦아준 동요 작곡가


박재훈은 1922년 강원도에서 태어나 평양 요한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동경제국고등음악학교로 유학을 떠났으나 일제강점기 말기 학도병 강제징용 문제와 극심한 재정적 어려움으로 인해 불과 반년 만에 도망치듯 귀국해야 했던 뼈아픈 과거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귀국 후 해방을 맞이하고 교사로 재직하던 중 터진 6·25 한국전쟁은 그의 인생에 지울 수 없는 참혹한 상흔을 남겼습니다. 해군 정훈음악대에 복무하며 참혹한 전쟁의 한복판을 지났던 그는, 부모를 잃고 거리를 떠도는 수많은 고아들과 피난민의 참상을 목도하며 가슴을 치며 통곡했습니다.

그가 전쟁의 비극 속에서 고통받는 어린 영혼들에게 작은 위로와 희망의 빛을 주고자 작곡한 곡들이 바로 '어머님 은혜(높고 높은 하늘이라)', '산골짝의 다람쥐', '시냇물은 졸졸졸졸', '펄펄 눈이 옵니다', '송이송이 눈꽃송이', '엄마 엄마 이리 와 요것 보셔요' 등입니다. 아이들의 동심을 지켜주기 위해 전쟁의 폐허 속에서 만들어낸 이 맑고 순수한 동요들은, 박재훈 내면에 깃든 긍휼의 마음과 그리스도의 사랑이 음악적으로 발현된 결과물이었습니다.

2. 한국 교회음악의 중흥과 민족사적 헌신


동요 작곡가로 널리 알려진 동시에, 그는 대광고등학교 음악교사, 중앙신학교 졸업, 한양대학교 음대 교수, 서울 영락교회 시온성가대 지휘자, 선명회 합창단 창설 및 지휘 등 굵직한 직책을 역임하며 한국 음악계에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1952년 울산중학교 교사였던 석진영이 쓴 절망 속의 호소문에 곡을 붙인 '눈을 들어 하늘 보라'를 비롯하여, '어서 돌아오오', '산마다 불이 탄다' 등 한국 찬송가 역사에 길이 남을 명곡들을 차례로 발표했습니다. 이 곡들은 모두 시대의 절망 속에서 하나님만을 앙망하라는 철저한 신앙적 외침이었습니다.

3. 디아스포라 교회의 개척과 생애 마지막까지의 예술적 투혼


박 목사의 삶 후반부는 또 다른 형태의 디아스포라 헌신으로 귀결됩니다. 그는 60세라는 늦은 나이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목사 안수를 받고, 1984년 캐나다 토론토로 이주하여 '토론토 큰빛교회'를 개척했습니다. 한인 이민 사회의 고단한 영혼들을 품고 목회했던 그는 1996년 은퇴 이후에도 원로 목사이자 일반 성가대 지휘자로 평기능을 자처하며 교회를 섬겼습니다. 후임 목사인 임현수 목사는 "30년 이상 모셨는데 단 한 번의 갈등도 없을 정도로 조용하고 겸손한 인격자였다"고 회고하며 그의 섬김의 리더십을 극찬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의 예술적 투혼이었습니다. 80대가 훌쩍 넘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박 목사는 오직 조국과 복음을 향한 사랑으로, 손양원 목사의 일대기를 담은 창작 오페라 '손양원'을 비롯해 '에스더', '유관순', '함성 1919' 등 민족의 신앙적 영웅들을 기리는 방대한 오페라 작품들을 직접 작곡했습니다. 2012년 오페라 '손양원' 공연을 위해 귀국한 그는 "자신의 아들을 죽인 원수를 끌어안고 한센병 환자들을 끝까지 돌보던 손양원 목사님의 모습을 현대 교회가 본받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작품을 썼다"고 밝혔습니다. 2021년 8월, 99세를 일기로 토론토의 병원에서 소천하기까지, 박재훈 목사의 생애는 그가 작곡한 찬송의 가사처럼 "물 붓듯이 부으시는 주의 은혜"(2절)를 온몸으로 입증해 낸 살아있는 에벤에셀의 위대한 증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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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부 찬송가 301장의 신학적 구조와 영적 해설

찬송가 301장의 가사는 단순히 서정적인 감정의 나열이 아닙니다. 과거-현재-미래라는 선형적인 구속사적 시간관을 철저하게 관통하며, 인간의 고난 속에 은밀하게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고백하는 완벽한 신학적 대칭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1. 1절: 과거의 은혜에 대한 회고 (에벤에셀의 신학)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 한이 없는 주의 사랑 어찌 이루 말하랴 / 자나 깨나 주의 손이 항상 살펴 주시고 / 모든 일을 주 안에서 형통하게 하시네"

1절의 중심을 관통하는 신학적 모티프는 사무엘상 7장 12절의 '에벤에셀(Ebenezer, 도움의 돌)'입니다. 성도가 인생의 고비를 넘어설 때, 자신이 지닌 지혜나 통찰력, 인간관계의 힘으로 위기를 돌파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이고 전적인 은혜가 배후에 있었음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특히 "모든 일을 주 안에서 형통하게 하시네"라는 고백은, 고통이나 환난이 전혀 없는 무사태평(無事泰平)의 기복주의적 형통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는 로마서 8장 28절에 기초한 섭리적이고 구속사적인 형통입니다. 질병, 이별, 사업의 실패, 이민 생활의 혹독한 고단함마저도 종국에는 하나님의 치밀한 구원 계획 안에서 영적 선(善)으로 직조되고야 만다는 강력한 긍정의 신학의 발현입니다.

 2. 2절: 현재의 고난을 이기는 힘 (임마누엘의 신학)


"몸도 맘도 연약하나 새 힘 받아 살았네 / 물 붓듯이 부으시는 주의 은혜 족하다 / 사랑 없는 거리에나 험한 산길 헤맬 때 / 주의 손을 굳게 잡고 찬송하며 가리라"

2절은 시선을 과거에서 '현재'의 실존적 고난으로 옮깁니다. 가사 속 '사랑 없는 거리'와 '험한 산길'은 성도들이 날마다 마주해야 하는 냉혹하고 차가운 현실 세계의 은유입니다. 타국에서 언어와 문화의 거대한 장벽에 부딪히거나 치열한 생존 경쟁 속에서 영적, 육체적 탈진을 경험할 때 성도는 자신의 철저한 연약함을 절감합니다. 그러나 작사자는 사도 바울이 자신의 육체의 가시 앞에서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린도후서 12:9)라고 들었던 성령의 음성을 재현하며, 현재의 척박한 고난을 견뎌낼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이 바로 '주의 손을 굳게 잡고 부르는 찬송'에 있음을 천명합니다. "물 붓듯이 부으시는"이라는 표현은 핍절한 영혼 위에 조건 없이 쏟아지는 성령의 임재를 극적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이 순간에도 나와 동행하신다는 '임마누엘(Immanuel)'의 신앙이 현재를 이겨내는 원동력입니다.

3. 3절: 미래의 소망과 영원한 안식 (마라나타의 신학)


"주님 다시 뵈올 날이 날로 날로 다가와 / 무거운 짐 주께 맡겨 벗을 날도 멀잖네 / 나를 위해 예비하신 고향 집에 돌아가 / 아버지의 품 안에서 영원토록 살리라"

마지막 3절은 성도의 궁극적인 종말론적 희망(Maranatha,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을 장엄하게 노래합니다. 이 땅에서의 순례길이 아무리 험난하고 생존의 무게가 어깨를 짓누를지라도, 영원한 안식처인 '고향 집(천국)'이 나를 위해 확고하게 예비되어 있다는 확신입니다. 이는 단순히 고통스러운 현실을 회피하여 죽음 이후의 세계만을 기약하는 염세주의적 도피주의가 아닙니다. 오히려 미래에 대한 그처럼 확고한 하나님의 약속이 나에게 주어져 있기에, 역설적으로 오늘의 고된 무거운 짐을 주님께 온전히 위탁하며 현재를 가장 치열하고 성실하게 살아갈 용기를 얻게 되는 종말론적 믿음의 극치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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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부 OCJ 독자를 위한 실천적 제언: 이민 교회 목회와 디아스포라의 미래

찬송가 301장에 내재된 100년이 넘는 웅장한 역사와 그 속에 담긴 치열한 신학적 메시지는, 오세아니아 크리스천 저널(OCJ)의 주 독자층인 시드니와 멜버른 등 오세아니아 전역의 한인 이민 교회 성도 및 목회자들에게 매우 직접적이고 각별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OCJ 지면을 통해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온 이민 교회의 양대 과제—즉, 비자발적 이중직을 감당하며 겪는 목회자의 생존권 문제와, 언어 및 문화적 단절로 인해 파생되는 다음 세대로의 신앙 계승 위기—에 대하여, 이 찬송의 형성 궤적은 깊은 목회적 해답의 단초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1. 생존의 씨름 속에 놓인 이중직 목회자와 성도들을 위한 '에벤에셀'의 위로


현대 이민 교회의 현실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습니다. 오세아니아 지역의 수많은 한인 목회자들은 주중에는 우체국, 물류 창고, 청소 등 생업 현장에서 땀을 흘리고 주일에는 강단에 서서 말씀을 전해야 하는 고단한 삶의 굴레에 놓여 있습니다. "목회의 사명과 생존의 현실 사이의 피 말리는 씨름" 속에서, 정착을 위해 '사랑 없는 거리'와 '험한 산길'을 매일 헤매는 평신도들의 삶 역시 고달프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일본에서 미국으로 오직 돈을 벌기 위해 건너갔던 원작자 사사오 테츠사부로의 초기 삶 역시 이민자들의 처절한 생존 투쟁과 전혀 다를 바 없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가 이방의 하숙집에서 목회자 부부의 전도를 통해 복음을 만나고 영적 지도자로 거듭났듯, 오늘날 오세아니아의 이민 교회는 단순한 친목과 생존 정보 교류의 장을 넘어, 디아스포라의 척박한 현실 속에서 영적 생명이 잉태되는 거룩한 인큐베이터가 되어야 합니다. "자나 깨나 주의 손이 항상 살펴 주신다"는 1절의 고백은, 경제적 불안정과 신분의 불안 속에서 떨고 있는 한인 디아스포라들에게 생존과 형통을 주관하시는 분이 결국 하나님이심을 일깨우는 강력한 강단의 선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2. 다음 세대를 향한 '신앙 언어'의 번역과 창조적 전수


이민 교회가 안고 있는 더욱 무겁고 근본적인 고민은 다음 세대의 신앙 계승 문제입니다. 영어가 완전한 모국어가 된 청년 자녀 세대가 한국어 중심의 1세대 예배에 적응하지 못하고, 부모에 대한 의무감만으로 교회를 지키거나 결국 영어권 교회로 이탈해 버리는 현상은 이민 교회의 뼈아픈 그림자입니다.

찬송가 301장이 영미 선교사의 신학(벅스톤)에서 시작해 일본어 가사(사사오)로 쓰였고, 다시 시대의 필요에 따라 한국어 번역(이장하, 이광수)을 거쳐, 종국에는 한국인의 영혼을 흔드는 토착적 선율(박재훈)로 완성되어 국경과 세대를 초월한 감동을 준 찬송가 형성의 역사는 우리에게 결정적인 목회적 교훈을 제공합니다. 복음의 절대적 진리(본질)는 결코 타협할 수 없지만, 그것을 담아내고 전달하는 그릇(언어와 문화적 형태)은 시대와 대상에 맞게 끊임없이 번역되고 진화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민 교회의 1세대 성도들은 자신들이 이민 초기의 척박한 땅에서 흘렸던 눈물과, 그 눈물을 닦아주셨던 "물 붓듯이 부으시는 주의 은혜"의 진실한 간증을 영어권 자녀 세대에게 그들의 언어로 치열하게 들려주어야 합니다. 언어가 다르고 문화적 사고방식이 달라도, 인생의 거대한 위기 앞에서 십자가만을 붙드는 부모 세대의 진실한 뒷모습(에벤에셀의 신앙)이야말로 다음 세대로 물려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영적 자산입니다. 최근 시드니에서 열리는 청소년 집회 RICE의 사례처럼, 원색적인 복음이 가장 현대적이고 시각적인 감각으로 전달될 때 다음 세대가 폭발적으로 회심하는 현상에서 보듯, 부모 세대의 '지금까지 지내온' 고전적 간증은 자녀 세대의 문화적 언어로 새롭게 편곡되고 변증되어야만 합니다.

3. '연합과 형통'의 새로운 목회 생태계 구축


찬송가 301장의 선율을 완성한 박재훈 목사는 토론토 이민 사회에서 개체 교회의 목회자로 봉사하면서도 분열과 갈등을 철저히 배격했습니다. 그는 후임 목사에게 리더십을 온전히 이양한 뒤에도 조용히 성가대 지휘자로 교회를 섬기며, 갈등이 잦은 이민 사회에 '겸손과 연합'이라는 깊은 족적을 남겼습니다.

"모든 일을 주 안에서 형통하게 하시네"라는 1절 후반부의 찬송 고백은 개체 교회의 이기적인 양적 성장이나 개교회주의적 번영을 넘어섭니다. 오세아니아 교계에 긴급히 제안되고 있는 '작은 교회들의 연합(Small Church Alliance)' 모델처럼, 개체 교회가 각자의 재정적·인적 한계를 겸손히 인정하고 영어권 사역자를 세우기 위해 서로의 자원(Resource)을 연합하여 공유하는 목회적 연대야말로, 하나님께서 이민 교회 생태계 전반에 원하시는 진정한 '형통'일 것입니다. 생존의 벼랑 끝에서 고립되지 않고, 주의 손을 굳게 잡은 채 지역 교회들이 '함께' 연합하여 찬송하며 걸어가는 새로운 동역의 발걸음이 절실히 요청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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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끝나지 않는 디아스포라의 순례, 그리고 영원한 에벤에셀의 찬양

찬송가 301장 '지금까지 지내온 것'은 주일 예배 시간에 3분 남짓 불리는 짧은 한 편의 노래이기 이전에, 근현대 기독교 역사의 피맺힌 아픔과 찬란한 영광이 고스란히 응축된 거대한 신앙의 기념비입니다. 세속적 부를 좇아 19세기 말 태평양을 건너 미국으로 이주했던 일본인 청년 사사오 테츠사부로가 이방의 하숙집에서 엎드려 눈물로 써 내려간 회심의 고백이, 일제 치하의 형언할 수 없는 핍박 속에서 신음하던 이장하 목사의 신학적 번역을 통해 한국 성도들의 가슴에 거룩한 소망의 불을 지폈고, 참혹한 동족상잔의 6·25 전쟁을 겪으며 피난민들을 위로하던 박재훈 목사의 예술적 혼을 통해 가장 한국적인 선율로 찬란하게 부활했습니다.

100년의 세월과 3개의 대륙을 횡단하며 완성된 이 장엄한 찬송의 역사는,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치밀한 손길이 개인의 참담한 고난과 민족의 위기, 심지어 디아스포라의 뼈저린 타향살이와 생존 경쟁까지도 합력하여 위대한 구속사적 유산으로 빚어내신다는 로마서 8장 28절의 진리를 가장 완벽하게 방증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오세아니아라는 낯선 대륙에서, 생업과 사역의 이중고를 감당하며 각자의 '험한 산길'을 묵묵히 걷고 있는 한인 디아스포라 성도들과 헌신된 이민 목회자들에게, 이 찬송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한 위로와 능력을 외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연약한 몸과 마음을 지탱해 오신 하나님이, 영적 황무지 같은 앞으로의 이민 생활의 길도 분명히 예비하실 것입니다. 무거운 생존의 짐을 십자가 앞에 모두 맡기고, 언어와 세대를 가로막는 문화적 장벽을 복음의 연합으로 돌파하며, 종국에는 나를 위해 예비하신 저 영원한 고향 집을 바라보는 순례자로서 힘차게 찬송하며 전진해야 합니다.

이민 교회의 눈물방울로 씨를 뿌리는 오늘 하루의 영적 수고가, 먼 훗날 1.5세와 2세 자녀 세대의 입술을 통해 오세아니아 전역에 울려 퍼질 또 다른 형태의 '에벤에셀의 찬양'이 될 것임을 우리는 굳게 확신합니다. 찬송가 301장은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주님 다시 뵈올 그 날까지, 전 세계로 흩어진 디아스포라 교회가 멈추지 않고 불러야 할 영원한 승리의 행진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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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NOTE]

이국땅에서 살아가는 디아스포라의 삶은 본질적으로 ‘나그네의 여정’입니다. 오세아니아의 높은 하늘 아래,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는 일상 속에서도 수많은 이민자 성도들과 목회자들은 저마다의 ‘험한 산길’을 걷고 있습니다. 신분 문제, 경제적 결핍, 자녀 세대와의 보이지 않는 문화적 장벽 등 우리가 마주한 현실은 때로 숨이 턱 끝까지 막히게 합니다.

그러나 찬송가 301장의 역사적 궤적은 우리에게 소망의 음성을 들려줍니다. 미국 땅의 외로운 유학생 사사오의 눈물이, 일제 치하 이장하 목사의 고백이, 그리고 전쟁의 폐허 속에서 고아들의 눈물을 닦아주던 박재훈 목사의 헌신이 모여 오늘날 우리의 가장 깊은 고백이 되었듯이, 지금 우리가 흘리는 눈물과 땀방울 역시 결코 헛되이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고단한 이민 생활 전체를 엮어 가장 아름다운 구속사의 멜로디로 빚어가고 계십니다. 오늘 하루, 무거운 짐을 주님께 온전히 위탁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오세아니아의 순례길을 '주의 손 굳게 잡고 찬송하며' 걸어가는 모든 독자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에벤에셀의 하나님은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영원히 우리의 피난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