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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보기 →분주한 일상 한가운데서 누리는 임재

화면 왼쪽에서 부드럽게 스며든 빛이 탁자 위의 소박한 빵과 인물들의 얼굴, 그리고 조심스레 포개어진 손등을 따뜻하게 감싸 안습니다. 17세기 네덜란드의 '빛의 마술사'로 불리는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의 초기작,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계신 그리스도>는 이렇듯 고요하고 다정한 빛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당시 개신교가 주류를 이루던 네덜란드 사회에서 가톨릭 신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핍박과 소외를 견뎌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페르메이르는 세상의 소음과 차별 속에서도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 고요한 신앙의 방을 마련했고, 그 방을 화폭 위로 정성스레 옮겨 놓았습니다. 그는 평범하고 소박한 일상의 순간들을 그저 스쳐 가는 시간으로 두지 않고, 신성하고 영원한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탁월한 재능이 있었습니다.
그림 속에는 빵바구니를 들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마르다와 예수의 발치에 가만히 앉아 말씀에 귀 기울이는 마리아, 그리고 부드러운 손짓으로 마리아를 가리키는 예수의 모습이 안정적인 삼각형 구도를 이루고 있습니다. 청년 페르메이르의 맑은 색채와 섬세한 명암은 빵을 굽고 손님을 대접하는 세속적인 집안일의 공간을, 영적인 가르침이 울려 퍼지는 '거룩한 성소'로 변모시킵니다.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화가가 붓끝으로 그려낸 영혼의 고요함이 우리 마음에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합니다.
일(Doing)과 존재(Being)가 교차하는 식탁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대체로 마르다의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해내야(doing) 직성이 풀리고, 성취의 크기로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려 애씁니다.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과 성과주의의 압박 속에서, 우리의 영혼은 늘 무언가에 쫓기듯 피로를 호소합니다. 마르다는 귀한 손님인 예수를 위해 최고의 대접을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빵바구니를 든 그녀의 손길에는 사랑과 헌신이 담겨 있지만, 동시에 마음의 분주함과 피로감도 배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시선과 손짓은 묵묵히 발치에 앉아 있는 마리아를 향합니다. 이는 마르다의 수고로운 '일(doing)'을 무가치하다고 탓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무엇을 해내기 이전에 주님 곁에 가만히 머무르는 '존재(being)'의 자리가 우리 영혼의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 되어야 함을 일깨워주시는 것입니다. 예수의 부드러운 손짓은, 성과를 내지 않아도 그저 곁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사랑받는 존재임을 확인시켜 주는 따뜻한 초청장과 같습니다.
일상에 스며든 하나님의 은혜
페르메이르의 그림이 주는 또 다른 감동은 일상과 신앙이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예수의 얼굴을 밝히는 은은한 빛은 마리아의 경청하는 얼굴을 지나, 마르다가 들고 있는 일상의 빵 위로도 동일하게 흘러내립니다. 성(聖)과 속(俗)의 경계를 허무는 이 부드러운 빛의 흐름은, 영원한 가치를 바라보는 마리아의 태도와 일상의 수고를 감당하는 마르다의 삶이 예수 안에서 아름답게 통합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삶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직장에서의 업무, 가사 노동, 누군가를 돌보는 일 등 반복되고 때로는 지루하게 느껴지는 일상의 순간들조차, 주님의 임재 안에서는 영원을 잇는 징검다리가 됩니다. 마음의 분주함을 내려놓고 내면의 고요를 지켜낼 때, 우리가 서 있는 바로 그 평범한 자리가 하나님의 은혜가 머무는 성소가 되는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 하루, 당신의 마음은 어디를 향해 분주히 달려가고 있습니까? 스스로를 증명하기 위한 뜀박질을 잠시 멈추고, 예수의 발치에 앉아 고요히 머물렀던 마리아의 시간을 당신의 일상으로 들여와 보시길 바랍니다. 화폭 전반에 흐르는 예수의 온화한 시선이, 오늘 하루 수고한 당신의 굽은 등 위로도 따뜻하게 내려앉기를 소망합니다. 분주한 일상 한가운데서도 영원의 빛을 마주하는 그 짧고도 깊은 멈춤이, 지친 당신의 영혼을 회복시키는 참된 안식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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