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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속에서 복음을 그리다: 운보 김기창 화백의 삶과 신앙

OCJ 2026. 10. 28. 04:16

올해로 소천한 지 25주기를 맞이한 운보 김기창 화백은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 굵직한 발자취를 남긴 거장이자, 짙은 어둠과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빛을 그려낸 위대한 신앙인입니다. 1913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7세 때 장티푸스를 앓고 그 후유증으로 청각을 완전히 잃게 되었습니다. 소리를 듣지 못하고 말도 할 수 없게 된 소년은 세상으로부터 단절된 적막의 세계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독실한 감리교 신자였던 어머니 한윤명 여사는 아들의 불행 앞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기도로 그를 품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가진 예술적 재능을 발견하고 당대 최고의 화가 이당 김은호의 문하로 이끌며 그를 붓을 든 화가의 길로 인도했습니다. 평생을 소리 없는 세상에서 살아야 했던 그는, 비록 세상의 눈에는 장애를 가진 바보처럼 보였을지 모르나 하나님 앞에서는 복음을 색채로 선포하는 선택받은 도구였습니다. 그의 삶은 고난을 예술로 승화시키고, 나아가 소외된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피어난 한 편의 감동적인 드라마와 같습니다.

김기창 화백의 신앙적 행적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것은 1952년부터 1953년까지 피난지 군산에서 그려낸 서른 점의 연작 예수의 생애입니다. 6.25 전쟁의 참화 속에서 동족이 겪는 끔찍한 고통과 굶주림을 목격한 그는 깊은 절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때 평소 친분이 있던 미국인 젠센 선교사가 그에게 예수의 일대기를 한국적인 화풍으로 그려볼 것을 권유했습니다.

 

운보는 전쟁으로 찢긴 우리 민족의 고난이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맞닿아 있음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는 갓을 쓰고 도포 자락을 휘날리는 예수,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마리아, 조선시대 관군의 모습을 한 로마 병사 등 철저히 한국적인 배경 속에 복음서를 재현했습니다.

 

이 성화들을 그리는 1년 반 동안 그는 예수의 성체가 꿈과 낮을 가리지 않고 보일 정도로 깊은 영적 몰입을 경험했습니다. 뼈를 깎는 고통 속에서도 붓을 놓지 않았던 그의 곁에는, 평생의 동반자이자 전혀 말을 하지 못하던 그에게 발성법을 가르쳐 세상과 소통하게 해준 아내 우향 박래현 화백의 헌신적인 사랑이 있었습니다. 운보는 철저한 고독과 침묵 속에서 오직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성경의 진리를 화폭에 담아내는 성경적인 삶을 살아냈습니다.

운보의 작품과 삶은 종교와 예술, 그리고 사회 전반에 걸쳐 실로 거대한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첫째로, 그의 예수의 생애 연작은 전 세계 기독교 미술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복음의 토착화 사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서양의 전유물로만 여겨지던 기독교 미술을 한국인의 정서와 문화 속으로 완벽하게 번역해 냄으로써, 한국 교회에 문화적 주체성을 부여하고 신학적 지평을 넓혔습니다. 이 작품들은 2017년 마르틴 루터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해 독일 국립박물관에 초대되어 특별 전시될 만큼 세계적인 찬사를 받았습니다.

 

둘째로, 그는 자신의 성공을 개인의 영달로 끝내지 않고 실천적인 사회적 영향력으로 환원했습니다. 자신이 겪은 청각장애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그는 1979년 한국농아복지회를 창설하여 초대 회장을 지냈고, 1984년에는 청각장애인 복지센터인 청음회관을 설립했습니다. 또한 운보원과 운보공방을 세워 농아들에게 도예와 목공 기술을 가르침으로써 그들이 사회의 당당한 일원으로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김기창 화백의 삶은 오세아니아와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의 현대 크리스천들에게 깊은 영적 교훈을 던져줍니다. 가장 먼저, 약함이 곧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는 역설의 진리입니다. 그는 청각장애라는 절대적인 결핍을 안고 살았지만, 그 침묵 덕분에 세상의 소음에 흔들리지 않고 영원의 목소리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에 찾아오는 고난과 한계 역시 하나님이 쓰시는 창조적인 캔버스가 될 수 있음을 그는 증명했습니다. 다음으로, 상황화된 복음의 중요성입니다. 운보가 한복을 입은 예수를 그렸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도 각자가 속한 문화와 이웃의 고통 속으로 복음을 번역해 내는 성육신적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그의 삶은 행동하는 사랑의 표본입니다. 예술적 성취에 머물지 않고 소외된 장애인들을 위해 평생을 바친 그의 행보는, 참된 신앙이란 화려한 고백이 아니라 이웃을 향해 내미는 따뜻하고 실질적인 손길에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스스로를 바보라 칭하며 한평생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을 잃지 않았던 운보 김기창 화백. 그는 세상의 소리를 듣지 못한 대신 하늘의 소리를 들었고, 입으로 말하지 못한 대신 붓으로 복음을 외쳤습니다. 2001년 영원한 안식에 들기까지 그가 캔버스 위에, 그리고 수많은 소외된 이웃의 삶 위에 남긴 붓 자국은 지금도 살아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침묵의 심연에서 길어 올린 그의 빛나는 신앙과 예술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각자의 삶이라는 캔버스 위에 어떻게 그리스도의 형상을 그려가야 할지 묻고 있습니다. 우리의 연약함마저도 아름다운 작품으로 빚어내시는 위대한 토기장이의 손길을 신뢰하며, 우리 또한 희망과 부활의 색채로 세상을 물들이는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12장 9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