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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보기 →빈민의 아버지, 닳은 가방 속에 담긴 영원한 노래: 수암 이연호 목사 평전
가난을 입고, 고난을 그리며, 그리스도를 살다 간 참된 구도자의 초상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 없다 하신 예수의 말씀을 가슴에 품고, 평생토록 낡은 가죽 가방 하나와 해진 외투 한 벌로 이 땅의 가장 낮은 곳을 누볐던 이가 있습니다. 수암 이연호 목사. 그는 20세기의 격동하는 한국 현대사 속에서 민족의 해방을 위해 옥고를 치렀고, 해방 이후에는 전쟁의 폐허와 가난으로 신음하는 빈민촌의 거름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인물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화려한 성전과 거대해진 세속적 성공에 함몰되어 있을 때, 수암의 닳아빠진 가방과 그 안에 담겼던 예술적 영혼, 그리고 빈민들과 나누었던 죽 한 그릇은 우리에게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묵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이연호의 삶은 단순히 한 목회자의 일대기를 넘어, 고통받는 민족의 운명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던 한 인간의 처절한 몸부림이자, 그 고난을 미적 세계로 승화시켜 복음을 증거하려 했던 구도자의 여정이었습니다.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가장 소외된 이들의 친구가 되어 그들의 삶 속으로 걸어 들어갔던 그의 생애를 조명하는 것은, 오늘날 상실된 기독교의 예언자적 목소리를 회복하는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수암 이연호는 1919년 황해도 안악에서 태어났습니다. 3.1운동의 열기가 전국을 뒤덮던 그해, 민족의 격랑 속에서 태어난 그는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15세 무렵 강원도 춘천으로 이주하며 혹독한 가난을 경험하게 됩니다. 춘천고등보통학교 시절, 그는 동복 한 벌로 5년을 견뎌야 했고, 졸업여행조차 갈 수 없는 현실 앞에 서야 했습니다. 그러나 가난은 그를 비굴하게 만드는 대신, 민족의 운명에 대한 예민한 자각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는 일본인 교사의 민족 차별 망언에 맞서 동맹휴학을 주동했고, 비밀독서회를 운영하며 민족의 자존을 지키려 했습니다.
1938년, 그는 항일 비밀결사 상록회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습니다. 경찰 심문 과정에서 그는 우리 민족이 일본의 간섭 없이 스스로 정치와 경제를 통괄해야 한다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감옥의 차가운 벽면은 그에게 고립의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민족과 소명을 깊이 성찰하는 영적 훈련장이었습니다. 유동식 교수의 회고처럼, 어려서부터 산기도를 통해 길러진 그의 신앙심은 민족의 고난을 자신의 십자가로 받아들이는 힘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출옥 후 그가 마주한 해방 정국과 한국전쟁의 비극은 그를 본격적인 빈민 목회의 현장으로 인도했습니다. 그는 사상범 교화기관이었던 대화숙 인근의 판잣집 호반재를 보며, 자신의 사명이 지배자의 위치에서 자선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먹고 자며 친구로 살아가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감리교신학교 기숙사에서조차 거리의 거지 아이를 데려와 죽을 나눠 먹던 그의 모습은 훗날 이촌동 빈민촌 사역의 예고편이었습니다.
한강 다리 옆 서부이촌동, 대홍수로 인해 수많은 빈민이 몰려들고 전염병과 살인이 끊이지 않던 그 절망의 땅으로 그는 이사를 감행했습니다. 벽이 떨어져 나가고 천막으로 지붕을 대신한 방에서 그는 아이들을 모아 성경을 가르치고, 병든 자들을 위해 병원을 세우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에게 빈민 목회란 물질적 혜택을 주는 시혜가 아니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격을 존중하고, 그들 내면에 깃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는 거룩한 노동이었습니다. 그는 쓰레기 줍는 청년들과 섞여 쓰레기 광주리를 메고 다녔으며, 폐병으로 죽어가는 이웃을 자신의 방에서 돌보며 그들의 임종을 지켰습니다.
그의 사역이 가난과 굶주림이라는 육체적 현실에만 머물렀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고난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탁월한 감각을 지녔던 예술가였습니다. 교회 건축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미군들의 초상화를 그렸던 그는, 훗날 한국기독교미술인협회를 창설하고 화가이자 미술사가로서 한국 기독교 미술의 지평을 열었습니다. 그는 기독교가 금기시하던 형상 문제를 예술적 성찰을 통해 풀어내고자 했으며, 자연과 일상의 고통을 펜화와 유화에 담아내며 신앙을 시각적 언어로 표현했습니다. 이촌동교회를 건축할 때도 그는 바실리카 양식과 로마네스크 양식을 절충하면서도 한국적 전통미를 살린 창호와 등을 달아, 예배가 우리네 삶의 터전과 동떨어지지 않음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그의 삶은 1948년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TIME)에 소개될 정도로 국내외의 주목을 받았고, 김구 선생이나 이승만 대통령 등 당대의 지도자들도 그의 헌신에 감복하여 병원과 교회 건립을 도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권력이나 명예에 마음을 두지 않았습니다. 은퇴할 때까지도 늘 검정색 단벌 양복과 헤진 외투, 낡은 가죽 가방을 들고 다니며 스스로를 최저의 생활에 가두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그들에게 죄를 짓는 괴로움'으로 고백할 만큼, 타인의 고통 앞에 철저히 겸허했습니다.
수암 이연호 목사가 남긴 영적 유산은 오늘날 우리에게 세 가지 중요한 실천적 교훈을 던집니다. 첫째는 '삶의 일치'입니다. 복음은 설교단 위의 언어가 아니라, 쓰레기 광주리를 함께 메고 죽을 나누는 삶의 자리에서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문화적 소통'입니다. 예술을 통해 신앙을 승화시켰던 그의 발자취는 오늘날 기독교가 세상을 향해 어떻게 문화적 접촉점을 만들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드러낼 것인가를 고민하게 합니다. 셋째는 '예언자적 낮은 자세'입니다. 사회적 성공을 향해 질주하는 현대 교회에, 그는 머리 둘 곳 없던 예수의 길이야말로 교회가 지향해야 할 유일한 영광의 길임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는 1999년 2월 6일, 더 이상 눈물도 고통도 없는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42년의 목회 여정은 끝났으나, 그가 남긴 낡은 가죽 가방과 그 안에 담긴 예술적 영혼, 그리고 빈민들과 함께 흘린 땀방울은 오늘날 한국 교회라는 거대한 성전 벽면을 뚫고 지나가는 서늘하고도 따뜻한 울림이 되어 남아 있습니다. 교회가 자신의 몸집을 불리는 데 급급할 때, 수암 이연호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의 친구입니까? 당신의 가방 속에는 무엇이 담겨 있습니까?
성경은 말씀합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태복음 20장 2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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