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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보기 →[사설] 가라앉는 투발루의 눈물과 기후 위선: 우리는 누구의 이웃이 되어야 하는가
주요 이슈: 2026년 10월 5~8일 피지와 투발루에서 열리는 Pre-COP31 기후 회의와 강대국들의 화석연료 정책 위선 논란

2026년 10월 5일부터 피지와 투발루에서는 제31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31)를 앞둔 'Pre-COP31' 사전 회의가 열리고 있다. 특히 해발고도가 평균 2미터에 불과해 수몰 위기에 처한 국가 투발루에서 세계 지도자들이 모인 것은 기후 변화의 최전선이 직면한 처절한 현실을 방증한다.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의 0.003%도 채 되지 않는 투발루와 태평양 섬나라들이 가장 먼저 국가 소멸의 위협을 겪고 기후 난민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해 있다는 사실은, 오늘날 글로벌 기후 위기가 지닌 뼈아픈 '불평등'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이 엄중한 회의장 밖의 현실은 냉혹하고 위선적이다. 이번 COP31의 협상 의장국이자 회의를 주도하는 호주조차 자국 내 대규모 석탄 광산 확장을 승인할지를 두고 국제사회의 거센 비판에 직면해 있다. 화려한 연단 위에서는 탄소 중립과 기후 정의를 부르짖으면서도, 정작 무대 뒤에서는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화석연료의 굴뚝을 끄지 않는 강대국들의 모순된 행태는 일종의 기만이다. 이는 그저 정치·외교적 실패를 넘어, 우리 시대가 앓고 있는 탐욕이라는 영적 질병의 치명적 증상이다.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기후 위기는 단순한 환경 문제를 넘어선 '창조 질서의 파괴'이자 '이웃 사랑의 실패'다. 하나님께서 위탁하신 창조 세계를 무분별하게 착취한 대가는 고스란히 스스로를 방어할 힘조차 없는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돌아가고 있다. 투발루의 해수면 상승은 누군가의 끝없는 소비와 편의주의가 만들어낸 거대한 구조적 폭력의 결과물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강도 만난 자의 진정한 이웃이 누구인지 물으셨다. 오늘날 강도 만난 자는 누구인가? 서서히 차오르는 바닷물 앞에서 고향과 생존권을 잃어가는 태평양의 기후 난민들이다.
이제 한국 교회를 비롯한 글로벌 신앙 공동체는 관행적인 기도를 넘어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야 할 때다. 탄소 중립 이행과 기후 난민 구호는 경제적 손익계산서로 접근할 사안이 아니라, 복음의 본질인 '공의와 사랑'의 적극적 실천이다. 우리의 일상에서 이루어지는 탄소 감축의 노력은 그 자체로 피조물의 탄식에 응답하는 회개(Metanoia)의 여정이며, 강대국들이 말의 성찬을 넘어 실질적인 온실가스 감축 행동에 나서도록 촉구하는 것은 십자가의 정의를 세우는 일이다. 가라앉는 섬나라 이웃들의 눈물을 닦아주지 못하는 신앙은 공허할 뿐이다. 우리의 신앙과 행동이 시대의 아픔에 응답하는 살아있는 방주가 되기를 간절히 촉구한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 마태복음 25:40
#기후정의 #PreCOP31 #기후난민 #투발루 #창조세계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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