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DAY'S WORD

이사야 41: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시드니 22°C ☀️
Admin

뉴스

더보기 →
문화/영혼의 미술관

낡은 성경과 닳은 소설책, 세속과 거룩의 경계에서

OCJ 2026. 8. 13. 04:32

어둡고 묵직한 캔버스 위에 두 권의 책이 놓여 있습니다. 화면의 중심을 압도하듯 차지하고 있는 커다랗고 두꺼운 가죽 양장본, 그리고 그 언저리에 놓인 작고 낡은 노란색 표지의 책 한 권. 그 옆으로는 방금 전까지 타오르다 생명을 다한 듯한 불 꺼진 양초가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가 1885년에 그린 <성경책이 있는 정물(Still Life with Bible)>입니다.

 


이 그림은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목사였던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직후에 그려진 자전적이고도 애틋한 작품입니다. 캔버스 위에 칠해진 고흐 특유의 짙은 색채와 거칠고 두꺼운 붓터치는 단순한 정물을 넘어, 살아서 요동치는 듯한 강렬한 생명력을 뿜어냅니다. 고흐는 한때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회자가 되기를 열망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광부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비참한 삶을 끌어안으려 했던 그의 투박한 열정은 제도권 종교의 문턱을 넘지 못했습니다. 

그림 속 굳게 닫혀 있던 아버지의 입술처럼 무겁고 거대한 성경책은 전통적이고 율법적인 신앙을, 그 앞에 초라하지만 선명한 색채로 놓인 프랑스 소설책은 흙먼지 묻은 삶의 애환을 상징합니다. 고흐는 아버지를 향한 애도와 함께, 자신이 평생을 바쳐 고민했던 '거룩한 말씀'과 '세속의 삶' 사이의 뼈아픈 갈등, 그리고 그 둘의 화해를 이 작은 캔버스 위에 조용히 펼쳐 놓았습니다.

아버지의 거대한 성경과 아들의 낡은 소설책

그림 속 두 책의 크기와 질감 대비는 무척이나 극적입니다. 아버지가 남긴 유품인 거대한 성경은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와 신의 권위, 그리고 엄격했던 율법적 세계를 대변합니다. 반면, 성경 곁에 무심한 듯 놓여 있는 노란 책은 고흐 자신이 즐겨 읽던 에밀 졸라의 소설 <삶의 기쁨(La Joie de Vivre)>입니다. 당대 현실의 모순과 인간의 고통을 적나라하게 그려낸 이 세속의 소설책은, 현대적이고 일상적인 삶의 진실을 찾고자 했던 고흐의 세계관을 투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거룩과 세속을 분리하려 합니다. 성경의 세계는 너무도 고결하여 세속의 때가 묻은 소설책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고흐는 이 두 세계를 하나의 식탁 위에 나란히 올려두었습니다. 그것은 엄격한 교리 속에 갇혀 있던 아버지의 신앙에 대한 반항이자, 동시에 세상의 비루한 현실 속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깃들 수 있다는 간절한 신앙고백이었습니다. 닳고 해진 노란 소설책 속에 담긴 민초들의 눈물과 한숨을, 거대한 하나님의 말씀이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묵묵히 품어 안고 있는 듯한 묘한 긴장감과 평화가 화면 속에 공존합니다.

꺼진 촛불과 이사야 53장, 고난의 한복판으로 찾아온 은혜

화면을 조금 더 가까이 들여다보면, 거대한 성경책이 펼쳐져 있는 페이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고난받는 종'을 노래하는 이사야 53장입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고흐는 영광과 승리의 말씀이 아닌, 가장 낮고 천한 모습으로 세상의 고통을 짊어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을 펼쳐두었습니다. 이는 에밀 졸라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상처 입은 이웃들의 삶과 이사야서의 고난받는 메시아가 결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음을 시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화려한 성전의 꼭대기가 아니라, 삶의 기쁨과 슬픔이 뒤엉킨 비루한 일상의 한복판으로 찾아온다는 신학적 통찰이 빛나는 대목입니다.

성경책 옆에 놓인 불 꺼진 촛불은 죽음을 맞이한 아버지의 부재를 슬퍼하는 아들의 눈물이자, 우리 모두가 언젠가 흙으로 돌아갈 존재임을 상기시키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의 은유입니다. 삶의 덧없음을 상징하는 꺼진 촛불 곁에, 영원한 위로의 말씀인 이사야서가 펼쳐져 있고, 그 앞으로 인간의 애환을 담은 소설이 놓여 있습니다. 이 완벽한 구도는 유한한 인간의 고통스러운 삶에 영원한 말씀이 어떻게 다가와 참된 위로를 건네는지를 시각적으로 증명해 냅니다.

삶의 책상 위에 올려진 우리의 신앙

오늘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크리스천들의 삶 역시 고흐의 캔버스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주일에는 영원한 진리인 성경책을 들고 거룩을 향해 나아가지만, 월요일부터는 다시 치열하고 고단한 세속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하루하루를 살아내야 합니다. 때로는 성경의 말씀과 내 삶의 현실(소설책)이 너무나 달라 깊은 갈등과 영적 방황을 겪기도 합니다.

고흐의 <성경책이 있는 정물>은 이 두 세계 사이에서 고민하는 우리에게 따뜻한 위로를 건넵니다. 신앙이란 세속의 책을 덮고 성경만 바라보며 현실을 도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신앙은 이사야 53장의 고난받는 종의 마음을 품고, 내 옆에 놓인 낡고 닳은 세상의 이야기 속으로 기꺼이 뛰어드는 것입니다. 꺼진 촛불처럼 덧없고 막막한 현실 앞에서도, 펼쳐진 말씀이 주는 영원한 은혜를 의지하여 내게 주어진 삶의 무게를 묵묵히 감당해 내는 것입니다.

당신의 책상 위에는 지금 어떤 책들이 놓여 있습니까? 우리의 일상이라는 식탁 위에 거룩한 말씀과 세상의 아픔이 나란히 놓여 서로 호흡할 때, 우리의 신앙은 비로소 세상에 진정한 위로와 생명력을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낡은 성경과 닳은 소설책 사이, 그 경계선에서 피어나는 십자가의 은혜가 오늘 하루 고단한 현실을 살아내는 당신의 삶 위에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빈센트반고흐 #성경책이있는정물 #세속과거룩 #메멘토모리 #기독교에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