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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영혼의 미술관

덜어냄의 미학으로 그려낸 수난의 여정

OCJ 2026. 7. 26. 05:08

프랑스 남부의 작은 마을 방스(Vence), 그곳에 자리한 로제르 예배당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우리는 뜻밖의 풍경과 마주하게 됩니다. '색채의 마술사'라 불리며 야수파를 이끌었던 거장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의 공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예배당 내부는 눈이 시리도록 하얀 여백으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그 하얀 벽면 위, 매끄러운 흰색 타일 바탕에 오직 검고 거친 선으로만 그어진 작품 하나가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바로 마티스의 <십자가의 길(Le Chemin de Croix)>입니다.

 


말년의 마티스는 우리가 알던 화려하고 자유로운 예술가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십이지장암 수술의 후유증으로 그는 휠체어에 몸을 의지해야만 했고, 붓을 쥘 힘조차 부족해 긴 막대기 끝에 목탄을 매달아 그림을 그려야 했습니다. 뼈를 깎는 육체적 고통의 시간 속에서, 그를 정성껏 간호해 준 이는 훗날 자크 마리 수녀가 된 젊은 간호사였습니다. 마티스는 그녀를 향한 깊은 우정과 감사의 마음을 담아 이 방스 예배당의 건축과 장식을 총괄하는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비록 그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독실한 신자는 아니었을지라도, 생의 마지막 불꽃을 태워 영적인 공간을 창조하는 이 일에 그는 깊이 헌신했습니다. "이 작업은 내 생애의 진정한 성취입니다"라는 그의 고백처럼, 휠체어 위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어 내려간 검은 선들은 곧 마티스 자신의 기도이자 영혼의 투쟁이었습니다.

화려함을 버리고 십자가의 본질을 껴안다

마티스의 <십자가의 길>은 전통적인 성화들이 보여주는 화려한 색채나 정교한 묘사를 철저히 배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땀방울, 일그러진 표정, 로마 군병들의 무기 같은 세부적인 묘사는 모두 생략되었습니다. 오직 동세(動勢)와 선의 굵기만으로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처절한 발걸음을 담아냈습니다. 

이러한 극단적인 '덜어냄'은 우리에게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묵상하게 합니다. 일생토록 색채의 아름다움을 찬미했던 화가가 생의 끝자락에서 모든 색을 내려놓고 흑백의 드로잉을 선택한 것은,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낮고 천한 모습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비움'과 묘하게 맞닿아 있습니다. 화려한 장식과 시각적 자극이 사라진 텅 빈 여백 속에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십자가의 묵직한 무게와 고난의 진실함에 더욱 깊이 다가가게 됩니다. 인물들의 얼굴에 표정이 지워져 있기에, 우리는 그 빈자리 위에 예수님의 고통받는 얼굴을, 그리고 그 십자가 뒤를 따르는 우리 자신의 얼굴을 가만히 겹쳐보게 됩니다.

단절 없는 고난의 굽이치는 길

이 작품의 또 다른 파격은 구도에 있습니다. 보통 가톨릭 성당에 걸린 '십자가의 길 14처'는 1처부터 14처까지 각각 독립된 액자나 조각으로 나뉘어 벽면을 빙 둘러 장식됩니다. 그러나 마티스는 14개의 장면을 분할하지 않고, 하나의 거대한 평면 위에 지그재그(zigzag) 형태로 배치했습니다. 맨 아래에서 시작된 수난의 여정은 마치 험준한 산길을 오르듯 굽이치며 위를 향해 이어집니다.

이 굽이치는 선들은 예수님의 고난이 뚝뚝 끊어진 단편적인 사건들이 아니라, 피할 수 없이 이어지는 하나의 길이었음을 보여줍니다. 거칠고 투박한 선들은 십자가의 무게에 짓눌려 비틀거리는 예수님의 호흡을 시각화한 듯합니다. 때로는 쓰러지고, 때로는 어머니 마리아를 만나며, 다시 일어나 십자가를 짊어지는 이 연속적인 흐름은 오늘날 우리가 걷는 신앙의 여정과도 닮아 있습니다. 우리의 삶 역시 평탄한 직선이 아니라 때론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며 지그재그로 이어지는 십자가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비워진 마음으로 걷는 영성의 길

수많은 정보와 자극이 범람하는 현대 사회 속에서, 우리의 마음은 종종 불필요한 근심과 세상의 화려한 욕망들로 가득 차 버리곤 합니다. 더 많이 가져야 하고, 더 화려해져야만 성공한 삶, 심지어 성공한 신앙이라고 착각하는 시대에 마티스의 <십자가의 길>은 조용하지만 강렬한 메시지를 던집니다. 

"본질을 보기 위해, 이제 그만 덜어내십시오."

오늘 하루, 마티스가 그어 내린 저 단순하고 투박한 흑백의 선들을 마음의 눈으로 따라가 보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기도를 장식하고 있는 화려한 수식어들을 덜어내고, 복잡한 마음의 방을 비워낼 때, 비로소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발자국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덜어냄의 미학이 선사하는 그 텅 빈 여백 속에서, 고난에 동참하는 진실한 영성과 세상이 줄 수 없는 깊은 평안을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기를 따뜻한 마음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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