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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보기 →효암 백남조 장로, 총신을 세운 믿음의 거목과 헌신의 발자취
개혁주의 신학의 터전을 닦고, 자신의 전부를 드려 미래를 심었던 한국 교회의 숨은 영웅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아까워하지 않았던 한 실업인의 결단이 한국 교회의 지형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1964년의 어느 날, 캠퍼스 없이 떠돌던 신학교의 현실 앞에 고뇌하던 이사장 노진현 목사에게 건넨 한마디, 누군가는 신학교를 위해 십자가를 져야 할 텐데 제가 미력하지만 학교 부지를 마련해보겠습니다. 이 짧고 단호한 고백은 오늘날 한국 개혁주의 신학의 요람인 총신대학교의 사당동 캠퍼스를 세운 거대한 방아쇠가 되었습니다. 오세아니아 크리스천 저널은 오늘, 시대를 앞서간 신앙의 개척자이자 평신도 지도자의 본보기인 효암 백남조 장로의 삶을 조명하며, 그가 남긴 숭고한 헌신과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영적 울림을 탐구하고자 합니다.
백남조 장로는 1913년 11월 1일 경상북도 성주군 용암면 죽전리에서 백낙진과 여기생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그는 향리의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며 유교적 소양을 쌓았고, 이는 훗날 그가 갖게 될 강직한 인격과 절제된 삶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1930년대 중반, 격동의 시대 속에서 청년기를 보내던 그는 1937년,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는 결정적 회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는 단순히 개인의 종교적 변화를 넘어, 이후 그의 모든 경제 활동과 사회적 사역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목적지로 향하게 되는 변곡점이었습니다.
그의 신앙은 머리로 아는 지식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1936년부터 1947년까지 조선철도자동차 제작 주식회사에서 근무하며 근대 산업 현장을 몸소 체험한 그는, 해방 이후 부산에서 광목 표백 사업을 경영하며 실업인으로서의 기반을 닦았습니다. 1953년 부산 부전교회에서 장로로 장립받은 그는, 공과 사가 분명하고 진리에 대해서는 타협을 모르는 인물로 알려져 주변 동료들로부터 꼬쟁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이는 그가 얼마나 말씀의 원칙에 충실했고, 자신의 신앙적 양심을 지키기 위해 세상과 치열하게 싸웠는지를 보여주는 방증입니다.
백 장로가 마주했던 시련의 용광로는 결코 작지 않았습니다. 한국 전쟁 이후 교단은 신학적 정체성과 교권의 갈등으로 분열의 아픔을 겪었고, 특히 총신대학교의 전신인 총회신학교는 안정적인 캠퍼스조차 갖지 못한 채 용산 등지를 전전하며 교육의 연속성을 위협받고 있었습니다. 당시 재정적 궁핍과 교육 환경의 미비는 신학 교육의 미래를 암담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백 장로는 이러한 시대적 한계 앞에서 좌절하는 대신, 이를 자신의 사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업적 성공을 부의 축적을 위한 수단이 아닌, 하나님이 맡기신 청지기적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도구로 이해했습니다.
1965년, 마침내 서울 동작구 사당동의 1만 8천 평 부지를 사들여 총회에 헌납한 사건은 한국 교회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평신도의 위대한 헌신으로 기록됩니다. 당대 사업가로서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학교가 바로 서야 한국 교회가 살고, 목회자가 바로 세워져야 민족의 장래가 밝아진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졌습니다. 이 헌납은 단순한 부동산의 기증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한국 개혁주의 신학의 뿌리를 내릴 거룩한 땅을 마련하고, 그 위에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의 인재들이 길러질 수 있는 영적 토양을 제공한 것이었습니다.
백남조 장로의 삶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봉사가 무엇인지를 웅변합니다. 그는 자신의 봉사관에 대해 봉사는 자기의 인격적 존엄을 염가로 파는 행위가 아니며,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 만인이 함께 누릴 수 있는 복지를 위해 인류애를 실천하는 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서번트 리더십은 오늘날 교회 내의 직분자들에게도 큰 귀감이 됩니다. 그는 초대 재단 이사장으로서 신학교의 기틀을 다지며 박형룡, 박윤선 등 당대 최고의 신학자들이 자유롭게 연구하고 가르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그의 영향력은 단순히 학교의 물리적 외형을 세우는 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의 아들 백성기 장로를 비롯해 후대들에게 이어진 헌신의 정신은 총신대학교가 오늘날까지 개혁주의 신학의 등불을 밝히는 데 보이지 않는 동력이 되었습니다. 성도들에게 그는 성공한 사업가의 모델이 아니라, 성공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가장 우선순위에 두었던 청지기의 전형으로 기억됩니다. 그가 남긴 묵직한 유산은 건물의 이름이 아니라, 그가 보여준 하나님 나라를 향한 절대적 충성심 그 자체입니다.
오늘날 세속화와 개인주의의 파고 속에서 우리는 백남조 장로의 삶을 통해 세 가지 실천적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 신앙은 반드시 구체적인 실천으로 증명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성경을 읽고 나면 즉시 실천에 옮기라는 그의 권면은 오늘날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입니다. 둘째, 자신의 전문 영역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한 도구를 찾아야 합니다. 실업인으로서 그는 사업을 통해 학교를 세웠습니다. 우리의 일터가 곧 선교지가 되어야 함을 그는 일생을 통해 증명했습니다. 셋째, 다음 세대를 위한 영적 투자에 인색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는 당장의 이익보다 미래의 목회자 양성이라는 더 큰 가치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1988년, 75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까지 백남조 장로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삶의 이정표로 삼았습니다. 그의 삶은 오늘날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위해 십자가를 지고 있는가. 당신의 소유가 누구를 위해 쓰이고 있는가. 그의 생애는 한 사람의 헌신이 어떻게 시대의 어둠을 걷어내고 거룩한 빛의 통로를 만드는지를 보여준 가장 아름다운 증언이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장 20절)
#백남조장로 #총신대학교 #기독교인물 #개혁주의 #평신도지도자 #헌신 #OCJ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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