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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보기 →더러운 물에 비친 하나님의 얼굴
[영혼의 미술관] 황금빛과 붉은빛의 따뜻한 색조가 화면을 포근하게 감싸는 그림 앞에 섭니다. 시선이 머무는 곳은 어느 허름한 방의 바닥입니다.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는 곧 기발하고도 충격적인 구도에 숨을 들이켜게 됩니다. 그림 속 어디를 둘러보아도 정작 주인공이어야 할 예수님의 얼굴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예수님은 굽힌 어깨와 팔만을 보여줄 뿐입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여 황급히 발을 빼내려는 베드로의 투박한 두 손만이 상황의 긴박함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우리의 시선이 베드로의 발을 씻기기 위해 떠놓은 탁하고 더러운 대야의 물에 닿는 순간, 묵직한 전율이 일어납니다. 흙먼지가 묻은 발을 씻겨내어 이미 뿌옇게 흐려진 그 물 위에, 예수님의 얼굴이 고스란히 비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놀라운 작품 <세족식(The Washing of the Feet)>을 그린 이는 독일의 사제이자 화가였던 지거 쾨더(Sieger Köder)입니다. 그는 2차 세계대전이라는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참상을 온몸으로 겪어낸 인물입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인간의 바닥과 절망을 목격한 그는 뒤늦게 신학을 공부하고 사제 서품을 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예술을 가리켜 '그림으로 하는 설교'라 불렀습니다. 사제로서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직접 섬기며 살아갔던 그의 헌신적인 삶은, 상처받은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로 화폭 위에 피어났습니다. 세상의 가장 어둡고 참혹한 진흙탕 속에서도 피어나는 성육신의 신비를, 그는 이 한 장의 그림에 숨 막히는 감동으로 담아낸 것입니다.
가장 낮고 탁한 곳에 새겨진 얼굴
보통의 종교화라면 예수님의 자비롭고 영광스러운 얼굴을 화면 정중앙에 배치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거 쾨더는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의 얼굴을 가장 낮고 더러운 대야의 물속에 밀어 넣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이 말하는 '성육신(Incarnation)'의 참된 신비입니다.
하나님은 저 높고 깨끗한 하늘 보좌에 머물러 계시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삶이 만들어낸 흙먼지와 죄악, 상처로 얼룩진 냄새나는 현실 한가운데로 기꺼이 내려오셨습니다. 그림 속 대야의 물은 우리의 삶을 닮아 있습니다. 이기심과 실패, 그리고 남몰래 흘린 눈물로 탁해진 우리의 마음에 예수님은 당신의 맑은 얼굴을 비추십니다. 가장 낮은 곳, 가장 더러운 곳에 자신의 얼굴을 새기신 그리스도의 사랑은, 높은 곳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우리의 시선을 바닥으로 끌어내려 깊은 묵상에 잠기게 합니다.
물러서는 베드로의 투박한 손, 그리고 우리의 부끄러움
그림 속 베드로의 손은 몹시 다급해 보입니다. 감히 스승이 자신의 냄새나는 발을 씻기려 하자 당혹스러움에 굳어버린 굵고 투박한 손가락이 인상적입니다. "내 발은 절대로 씻기지 못하십니다!"라며 만류했던 성경 속 베드로의 외침이 귓가에 들리는 듯합니다.
우리의 모습도 베드로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나의 가장 깨끗하고 번듯한 모습만을 보여드리고 싶어 합니다. 내 삶의 수치스러운 부분, 씻겨지지 않은 상처와 더러운 발은 꽁꽁 숨기려 합니다. 그러나 엎드린 예수님의 단단한 팔은 결코 베드로의 발을 놓지 않습니다. 우리의 더러움이 씻겨나가 대야의 물이 더욱 탁해질수록, 그 물에 비친 하나님의 얼굴은 오히려 더욱 선명하고 따뜻하게 빛납니다. 우리의 상처와 부끄러움을 마다하지 않고 끌어안으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위로가 그림 밖으로 흘러넘칩니다.
지배하는 삶에서 수건을 두르는 삶으로
타인 위에 군림하고, 누군가를 밟고 올라서야만 성공이라고 말하는 현대 사회의 차가운 논리 속에서 이 그림은 강력한 영적 도전을 던집니다. 진정한 위대함이란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데 있음을 묵묵히 증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지배하려 하지 않으시고,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종의 자리로 내려가셨습니다. 그림 속에서 대야를 향해 숙인 예수님의 넓은 어깨는 오늘을 살아가는 크리스천들에게 묻고 있습니다. "너희는 지금 어느 자리를 향해 가고 있느냐"라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하루 치열한 삶을 살아내느라 여러분의 발은 얼마나 상하고 더러워졌습니까? 지거 쾨더의 그림은 우리를 향해 부드럽게 초청합니다. 먼저 여러분의 지치고 냄새나는 발을 주님께 온전히 내어드리십시오. 가장 탁한 물속에 얼굴을 비추시는 그분의 따뜻한 손길로 위로를 얻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내일은 우리가 누군가의 발을 씻기기 위해 기꺼이 수건을 두르고 무릎을 꿇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낮아진 어깨와 섬김을 통해, 이 세상의 탁한 대야 속에서도 또 한 번 하나님의 찬란한 얼굴이 비치게 될 것입니다.